연습방/시모음

180930 창작 시극 관람-사라진 것들의 이야기, 포항역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8. 10. 3. 21:25

시 숲 쌤이 주관하는 창작시극-사라진 것들의 아야기, 포항역 오후 5시 포항문예회관 소극장으로 향했다

일요일 늦은 오후의 나들이는 참 고민하게 했다

월요병이 드는 새러리맨은 아니어도

한 주 휴식의 마지막 시간이란 생각에 사로 잡힌다

그래도 시 시간 공지를 들은 바, 한 자리 해 주는 것도 의리란 일말의 생각이 든다

 

망설이다 출발이라 간신히 5분 전에 소극장에 입장

옆구리 문으로 들어서는데

권위에 사로잡혀 목에 잔뜩 풀목인 한 위인

지만 환갑 먹은거로 착각하는 얼라 위인

앉아 인사 받으려는 얼굴 쌩까고

그 앞 빈 의자를 통해 반대편에 착석

꼴갑들 눈 시려 이런 자리에 오고싶지 않은디...

 

**창작시극-사라진 것들의 이야기,포항역-만들어진 배경**

1세기의 역사를 간직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구.포항역을 배경으로 일생을 꾸려나간 한 가족의 이야기를 시와 음악으로 엮어낸 극입니다. 20세기 초부터 21세기를 잇는 파란만장했던 한 어머니의 삶 속에서 우리는 보잘 것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잊혀지고 사라진 이야기, 잃어버리고 감추어진 이야기를 통해 포항에 몸과 마음을 붙이고 살고 있는 우리네 가족과 이웃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창작시극의 줄거리**

한 여인 사라진 구, 포항역 근처 도로에서 길을 잃은 듯 두리번거리며 극은 시작됩니다. 그 여인은 여섯 명의 딸을 낳은 어머니이자 월남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이고

지금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94살의 할머니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자신이 열여덟 살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찾는 6명의 딸과 한명씩 조우하며 극은 지난 과거의 일들과 마주하고....

 

**창작시극에 등장하는 시들**

1. 황홀한 국수 / 고영민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렇게 말아

그릇에 얌전하게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에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2.이 세상 등근 것에는/서숙희

 

푸른 달이 저 허공에서
둥두렷이 둥근 것은
이 세상 온갓 어둠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어둠 제 살 다 허물도록
삭였기 때문이다

어머니 젖 가슴이
저 하늘처럼 둥근 것은
열 손가락 같은 자식 다
품었기 때문이다
그 가슴 한 생에 다하도록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소슬한 저 활이
내 그리움 같이 둥근 것은
그대 그 아득한  중심에
닿고픈 이 한마음
안으로 무수히 꺾었기
때문이다

3.눈잣나무/차영호

 

저런 생生도 있었거니

 

중청中靑에서 대청大靑사이

칼바람 돌너덜에 납작 엎드린

명命

 

일어서기는커녕

기지개 한 번 못 켜고

눈물에 만 밥을 먹는 이여

 

지구 한 귀퉁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그대

 

내려가면 나도

어깨를 으쓱이며 걸어야겠다

 

 

4.무논의 책/이종암

 

아버지는 멋진 책을 잘 만들었다
봄과 여름 사이 오월의 논에 아버지
산골짝 물 들여와 소와 쟁기로 해마다
무논의 책 만든다

 

모내기 전의 무논은 밀서(密書)다
하늘과 땅이 마주보는 밀서 속으로
바람이 오고 구름이 일어나고
꽃향기 새소리도 피어나는 무논의 책

 

어머니 아버지 책 속으로 걸어가면
연둣빛 어린 모가 따라 들어간다
초록 치마를 펼쳐놓은 책 위로
하늘이 구름 불러 햇볕과 비를 앉히고
한철 또록또록 그 책 다 읽고나면
밥이 나왔다
무논의 책이 나를 키운다

 

*무논 물이 늘 차 있거나 쉽게 물을 댈 수 있는 논, 水田

 

5.열무김치가 슬프다/권 선 희

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은 장날이었지
열무 두 단을 샀어
시들어 버린 오후
짚으로 묶인 허리가 짓무르고 있었지만
어디 내 속만 하겠어
벌레 갉은 구멍 숭숭했지만
묵직했어 고작 두 덩어리지만
무수한 몸이 한 데 묶여 있었거든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무겁고 길었어

신문지를 깔고 털퍼덕 앉아 다듬었지
뿌리 잘라내고 웃자란 잎도 잘랐어
나를 다듬고 있었는지도 몰라
반쪽으로 꿈틀대는 애벌레처럼
희날재 어디쯤 지나고 있을 너를
지금이라도 따라 갈까
망설이기도 하면서 말이야

굵은 소금을 뿌리며 생각했어
잘만 버무리면
고추장에 쓱쓱 비벼 슬픔도 보리밥처럼
넘길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
너를 배웅하던 정류장까지도
아마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시집 『구룡포로 간다』(애지, 2007년)

* 이 시의 화자는 이별을 하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열무 두 단을 삽니다. 열무를 사고 그걸 다듬고 절이는 일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화자가 움직이며 가는 길을 따라가는 동안 이 이별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이별인가를 알게 됩니다. 짓무르는 열무잎도 내 속만은 못하다고 말합니다. 한데 묶여 있는 열무를 보면서 한데 묶일 수 없는 자신들을 생각했겠지요. 열무 두덩어리를 들고 오는 길이 무겁고 긴 건 이별의 아픔이 무겁고 길다는 뜻이겠지요.

열무를 다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다듬고 있는 것이고, 지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갈까 하고 갈등하기도 합니다. 열무김치가 아니라 슬픔을 어떻게 버무리고 비비고 씹어 넘길까를 생각하는 화자의 마음은 ‘애이불비(愛而不悲)’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솔직한 자리에 가 있습니다. 슬픔을 과장하지도 않지만 사소한 것으로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태연한 듯 앉아 있지만 슬픔을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켜보고 있는 그 심정적 거리가 미적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열무김치를 다듬고 있는 그 시간, 이별 이후의 순간 순간이 얼마나 아픈 시간인가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 권선희는 1965년 춘천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예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1998년 《포항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푸른시>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회**

포항 시인들의 별도 모임은 있겠으나, 모임 밖에서 들여다 본 느낌은, 시인들간 왠지 데면데면한, 서먹서먹한, 권위주의파와 비권위주의파의 파도, 뭐 그런 이상 야릇한 관전의 소회가 있었던 바, 이번 창작시극을 통해, 포항 시들의 통일 조짐의 싹을 본 느낌이 든다, 계속 지켜보고 싶다. 반가운 모임이길 바란다. 포항밖에서도 알아주는 시인의 탄생을 소원해본다. 순서지의 시들도 쬐끔은 권위주의에서 탈피한 순서라 좀 고소하다. 참기름 병 뚜껑을 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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