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180918 시 숲 산책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8. 9. 19. 01:51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순례15/오규원>

 

우리가 문을 밀고 나설 때

그 문이

다시 문 앞의 바람을 밀고

그때마다 그 문이

그대와 나의 앞과 길을

조금씩 허물 때

 

나의 무의미한 한순간의 발놀림과

그대의 손놀림이 우리의 눈앞에

한 잎 나뭇잎처럼 매달려

우리의 눈 속을 기웃거릴 때

 

그때다, 그대와 내가

한 잎 뒤의 세계를

서둘러 훔칠 때는

 

<시인 구보씨의 일기 5>

 

눈이, 하얀 눈이 온다 나는

나의 적인 내 자식들과 벽과 나의 적인 적과

눈싸움을 한다 보드라운

눈송이를 두 손으로 모아 쥐면

차고 무서운 힘이 된다 눈이

하얀 눈이 오면 피가 따스하다

피가 따스할 때

내 피가 따스할 때 눈싸움을 하자

눈싸움은 아직 피가 따스할 때의 싸움

 

눈은 높은 곳에서 내려온다 눈이

내려오는 것은 하늘의 집이 이 띵의

낮은 곳에 있고 나의 적들과

내 집이 그곳에 있고

눈이 제일 먼저 가장 낮은 곳에 쌓이는 것도

아직 따스한 사랑이

낮고 더러운 우리집 근처에

젖어 있는 탓이다 눈이

하얀 눈이 온다 나는 낮은 곳에서

눈을 뭉치고 눈 오는 날만큼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차고 무서운

눈덩이를 던지며 싸운다

 

***겨울숲을 바라보며/오규원***

 

겨울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얻는다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시의 주제는 "원죄의 고백

*시인 최형심의 시평 :세상에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착같이 소유하려고 하죠. 저기 나무들을 좀 보세요, 한때 소유했던 그 무성한 잎과 빛나는 꽃들을 완전히 벗어버린 겨울의 나무들을요. 이 시를 만나기 전까지 저는 겨울의 나무를 헐벗고 움츠린 것으로만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무욕함을, 그 정결함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아마도 제가 소유욕에 눈이 멀어 완전히 벗어 본 적이 없어 그런 것 같습니다. 한 벌의 죄를 단단히 여미여 종종 걸음을 치던 저는, 아마도 그래서 겨울나무 앞에만 서면 부끄러움에 저절로 몸이 떨렸던 것 같습니다.

 

<문/오규원>

 

문이라고 해서 반드시

열리기도 하고 또 닫히기도 하지 않고

또 두드린다고 해서 열리지 않는다

어느 집에나 문이 있다

어느 집이나 문은

담이나 벽을 뚫고 들어가

담이나 벽과는 다른 모양으로

자리 잡는다

 

담이나 벽을 뚫고 들어가

담이나 벽과 다른 모양으로

자리 잡기는 잡았지만

담이나 벽이 되지 말라는 법이나

담이나 벽보다 더 든든한

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는 어디서나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앉으면 중심이 다시 잡힌다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일어서기 위해 앉는다

만나기 위해서도 앉고 협잡을 위해서도 앉고

의자 위에도 앉고 책상 앉듯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

가볍게도 앉고 무겁게도 앉고

창탁불문 장소불문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밑을 보기 위해서도 앉고

바닥을 보기 위해서도 앉는다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

 

***남들이 시를 쓸 때/오규원***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오늘도 감기지 않는 내 눈을 기다리다

잠이 혼자 먼저 잠들고, 잠의 옷도, 잠의 신발도

잠의 문패도 잠들고

나는 남아서 혼자 먼저 잠든 잠을

내려다본다

 

지친 잠은 내 옆에서 쓰러지자마자 몸을 웅크리고  ->묘사/보여줌

가는다랗게 코를 곤다

나의 잠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잠은 방문까지는 왔다가 되돌아가는지

방 밖에서는 가끔

모래알 허물어지는 소리만 보내온다

남들이 시를 쓸때 나도 시를 쓴다는 일은

남들이 시를 쓸 때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라고

나의 시는 조그만 충격에도 다른 소리를 내고

 

잠이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나의 잠을

누가 대신 자는가

님의 잠은 담의 평화이고

나의 잠은 잠의 죽음이리고

남의 잠은 잠의 꿈이고

나의 잠은 잠의 현실이라고

나의 잠은 나를 위해

꺼이 꺼이 울면서 어디로 갔는가

 

*주제는 " 잠이 오지 않음을 못견뎌함"

 

<우리집의 그 무엇엔가/오규원>

 

우리집의 그 무엇인가에

우리집의 그 어딘가에 분명히

그것이 있기는 있다

작은놈의 여린 숨통을 막는 이유가

집 안, 집 밖,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있기는 어딘가에 있다

 

작은놈의 기관지 협학증은, 유전병이 아닌

작은놈의 숨통을 막는 기관지 협착증은

우리집의 그 누구도 이유를 모른다

담당 의사까지도 헛집기만 한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어둠 속에서

막힌 숨통이 녀석을 깨우면

녀석의 눈은 고양이모양 은밀하게 번쩍인다

소리도 없이 거실에 나타나서는

이곳저곳에 놓아 둔 기관지 확장제를 찾아 먹는다

 

그때마다 나는 잠을 깨고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깨어 서성거리는 것뿐

이런 나를 보고 녀석은 어른이 된다

나의 아들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

가서 자라고 나를 타이른다

 

죽임이란 별게 아니다

분명히 이렇게 있을 줄 알면서도

이렇게 헛짚기만 하는 일

숨통이 막히어 손톱이 드디어 파래지면

아홉 살 짜리도 죽음이 보이는지

목소리가, 목소리가

낮게 낮게 가라앉는다

 

밝힐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

어딘가에 무엇인가에 그것이 있는지 모른다고 해서

우리집에 그것이 없다고 할 수 없듯

이번에는 아홉 살 짜리가 아니라

그것이, 보이지 않는 그것이

내 앞에 죽음을 앉힌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순례 1/오규원***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가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어죽은 강을 거슬러울라

하늘이 닿은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번뇌, 날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분식집에서/오규원***

 

바닥에게는 낮은 창문도                 ->묘사

희망이고

 

몸이 무거운 나무에게는 떨어지는    ->묘사

잎 하나도 기쁨이다

 

층계 위에 오래 앉아 있는 나는       ->묘사

내려가는 것이 희망이고

 

엊저녁 산부인과에 가서 낙태 수술을 하고             ->구체적 후술

지금은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고 앉아 있는 아이와

어제까지 몰랐던 여자와 아침까지 자고

지금은 분식짐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 아이와

그러고도 아직 사랑에 굶주린

 

이 아이들의 공복으로 배가 졉혀오는 내 머리 위의 도시에     -???

그늘을 펴고 있는 라일락의 꿈이

당신은 꽃을 피우는 일이라고 쉽게 짐작하겠지만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라일락의 꿈은

시든 꽃을 흔들어버릴 4월의 바람이고

바람도 아니 부는 4월의 봄은

꽃피는 절망이다

 

*시의 주제는 절망

*시는 리듬과 이미지가 생명

'연습방 > 시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0930 창작 시극 관람-사라진 것들의 이야기, 포항역  (0) 2018.10.03
180926-서울의 찬가  (0) 2018.10.01
180918 미션/문  (0) 2018.09.19
**참사랑의 모습/이정하**  (0) 2018.09.17
**옹이/류시화**  (0) 2018.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