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으로 쓴 시 샘플**
<남루한 삶이 움직이는 소리>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고 말이다. 이것은 더러운 진창과도 같은 역사와 남루한 한반도에서의 삶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태도 변화다. 진창에 뿌리를 내려 거대한 나무로 자랄 수만 있다면, 진창의 더러운 물은 모조리 나무의 자양분으로 흡수될 수 있다는 통찰이다. 이를 위해 나무는 진창을 돌보지 않고 거대한 나무가 될 때까지 하늘을 향해 자신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만 한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김수영의 ‘온몸의 시학’, 혹은 ‘자유의 시학’을 이처럼 말끔하게 정리한 시를 본 적이 없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그러나 억압과 비참의 시대를 상징하는 냉혹한 겨울을 견디어 내며 온몸으로 온몸을 밀어붙이지 않는 다면, 자유로 찬란하게 ‘꽃피는 나무’는 자랄 수 없다. 김수영, 혹은 황지우처럼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 가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이니까 살아 낼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마음껏 향유하면서 살게 된다. 이때 진창과 차가운 땅은 사라지고, 다양한 나무들이 다른 나무를 모방하지 않은 채 자기만의 꽃을 피우는 자유의 봄이 가능해질 것이다.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이
우리의 역사를 가르쳐 준다 우리의 환희를
폴 속에서는 노란 꽃이 지고 바람소리가 그릇 깨지는 소리보다 더 서걱거린다
-우리는 그것을 영원의 소리라고 부른다
해는 청교도가 대륙 동부에 상륙한 날보다 밝다
우리의 재 災,우리의 서걱거리는 말이여
인생과 말의 간결-우리는 그것을 전투의 소리라고 부른다
미역국은 인생을 거꾸로 걷게 한다 그래도 우리는
삼십대보다는 약간 젊어졌다 육십이 넘으면 좀 더
젊어질까 기관포나 뗏목처럼 인생도 인생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빈궁의 소리라고 부른다
오오 환희여 미역국이여 미역국에 뜬 기름이여 구슬픈 조상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든 정다산이든 수염 난 영감이면
복덕방 사기꾼도 도적놈 지주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워라
자칭 예술파 시인들이 아무리 우리의 능변을 욕해도-이것이
환희인 걸 어떻게 하랴
인생도 인생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결혼의 소리라고 부른다 <미역국 1965.6.2>/김 수영
아마 자신이나 누군가의 생일날이었나 보다, 그는 생일상에 차려진 미역국을 응시하게 된다. 수중한 날이어서 미역과 함께 소고기도 몇 점 넣어 끓였다. 그 몇 점도 안 되는 소고기는 미역국 위에 기름 망울을 만들었다.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을 보는 순간, 김수영은 ‘우리의 역사’ 곧 자신의 역사를 직면한다. 미역국은 값싸고 흔한 음시인데, 거기에 비싸고 귀한 소고기를 넣었다. 둘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소고기의 기름은 미역국에 섞이지 못하고 표면으로 튕겨 올라다. 기름이 떠 있는 미역국은 화려하고 풍성해 보인다. 그러나 기름에 굴절된 미역의 모습을 바로 보라, 남루한 것을 남루한 것으로 긍정하지 못하고 번지르르한 기름으로 그것을 가리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자 김수영 본인의 모습이다. 미역국에 떠 있는 화려한 기름을 걷어 낼 수 있을까. 먼저 그는 동시대 지식인에게 절규한다. ‘퇴계든 정다산이든 수염 난 영감이면 복덕방 사기꾼도 도적놈 지주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워라.’ ‘수염난 영감’ 바로 지식인이다. 스스로 살아 내지 못하고 타인의 삶에 기생하기 때문에 그들의 수염은 ‘미역국 위에 뜨는 기름’처럼 번들거린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사실 중국이나 서양으로부터 수입된 최신 사상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 지식 수입상이었다. ‘미역국’은 이런 현실에 대한 김수영의 뼈저린 반성이다. 남루하다면 남루함을 고치면 되지만 남루함을 화려함으로 가리려고 한다면, 남루함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 역사가 가진 문제점을 보는 순간, 김수영은 ‘환희’의 감정을 느낀다. 이제 치유의 희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영원의 소리‘ 전투의 소리’ 빈궁의 소리, 그리고 결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영원의 소리‘는 화려한 문명의 외관 이면에서 서걱서걱 소리를 내던 생명과 삶의 소리다. ’전투의 소리‘는 미역국에 뜬 기름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 ’삶과 말‘을 간결하고 진솔하게 하려는 투쟁의 소리다. ’빈궁의 소리‘는 일체의 허위의식을 버리고 온몸으로 삶을 영위하기에 발생하는 정직한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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