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몸과 마음을 다
장독 뚜껑 열 때마다
항아리 속 묵은 시간에다 인사하지
된장 고추장이 얼마나 제맛에 골똘한지
손가락 찔러 맛보지 않고는 못 배기지
술 항아리 본 적 있을 거다
서로 응원하느라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입술들
장맛 술맛도 그렇게 있는 힘 다해 저를 만들어가는데
글 쓰고 애들 가르치는 사람은 말해 뭐 하겄냐?
그저 몸과 맘을 다 쏟아야 한다
무른 속살 파먹는 복숭아벌레처럼
턱만 주억거리지 말고
2. 한숨의 크기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냇물 흐린다지만
그 미꾸라지를 억수로 키우면 돈다발이 되는 법이여
근심이니 상심이니 하는 것도 한두 가지일때는 흙탕물이 일지만
이런 게 인생이다 다잡으면,
마음 어둑어둑해지는 게 편해야
한숨도 힘 있을 때 푹푹 내뱉어라
한숨의 크기가 마음이란 거여
3. 나비 수건
고추밭에 다녀오다가
매운 눈 닦으려고 냇가에 쪼그려 앉았는데
몸체 보시한 나비 날개
그 하얀 꽃잎이 살랑살랑 떠내려가더라
물속에 그늘 한 점 너울너울 춤추며 가더라
졸졸졸 상엿소리도 아름답더라
맵게 살아봐야겄다고 싸돌아다니지 마라
그늘 한 점이 꽃잎이고 꽃잎 한 점이 날개려니
그럭저럭, 물 밖 햇살이나 우러르며 흘러가거라
땀에 전 머릿수건 냇물에 띄우니 이만한 꽃 그늘이 없지 싶더라
그늘 한 점 데리고 가는 게 인생이지 싶더라
4. 물
티브이 잘 나오라고
지붕에 삐딱하니 세워논 접시 있지 않냐?
그것 좀 눕혀놓으면 안 되냐?
빗물이라도 담고 있으면
새들 목도 축이고 좀 좋으냐?
그리고 누나가 놔준 에어컨 말이다
여름 내내 잘금잘금 새던데
어디에다 물을 보태줘야 하는지 모르겄다
뭐가 그리 슬퍼서 울어쌓는다니?
남의 집 것도 그런다니?
5. 그믐달
가로등 밑 들깨는
올해도 쭉정이란다
쉴 틈이 없었던 거지
너도 곧 좋은 날이 올 거여
지나고 봐라
사람도 밤낮 밝기만 하다고 좋은 것 아니다
보름 아녔던 그믐달 없고
그믐 없었던 보름달 없지
어둠은 지나가는 거란다
어떤 세상이 맨날
보름달만 있겄냐?
몸만 성하면 쓴다
6. 나이
나이 따질 때, 왜
만 몇 살이라는지 아냐?
누구나 어미 배 속에서 만 년씩 머물다 나오기 때문이여
삼신할미 품에서 만 살씩 잡수시고 나온 분들이라 그런 겨
그러니께 갓난아기가 아니라, 갓난할배 갓난할매인 겨
늙고 쭈그러져, 다음 우주정거장이 가까워 오면
아기들한테 턱수염 잡히고 지팡이 뺏겨도
합죽합죽 매화꽃이 피지, 봄은 말이다.
늙은이들 입가에서 시작되는 겨
눈틀밭틀 같은 주름골에서 터지는 겨.
7. 빗맛
혀로 느끼네, 단맛
마음까지 당기네, 감칠맛
아지랑이 피어나네, 봄맛
눈이 좋아하네, 눈맛
일고 또 읽고, 글맛
입에 꽃이 피어나네, 말맛귀가 쫑긋해지네, 귀맛
요리와 낚시는 즐거워라, 손맛
찰싹! 에고 아파라, 된맛
오랜 가뭄에
마른 흙과 부리와 이파리가
쩝쩝, 쪽쪽, 팔랑팔랑, 빗맛
이제야 힘이 솟네, 거름맛
풀 나무 살아나니
시름맛은 도랑 따라 흘러가고
밥맛이 돌아오네
살맛이 살아나네
8. 굴뚝연기
굴뚝연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누군가의 차가운 등짝을
덥히고 왔기 때문이지요
9. 까치밥
산골마을
할아버지 할머니들뿐이네
빈집 감나무
홍시 따는 사람 없네
손닿는 밑가지만으로도
오물오물 먹고도 남네
동네 까치들
겨우내 변비 걸리겠네
봄이 오면
응까악! 응까악!
피 묻은 까치 알
까치 똥구멍 찢어지겠네
10. 소설
너무 힘들어서
물가에 고무신 벗어놓고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데, 눈물이 마르면서
고무신 안쪽에 자동차바퀴가 보이더구나
그 껌정고무신이 타이아표였거든
바퀴 안에 진짜라고 써 있더구나
애들 돠두고 진짜 죽으려고?
그래 얼른 신발을 다시 꿰찼지
저수지 둑을 벗어나 집으로 오는데
신발 속에서 진짜, 진짜, 울먹이는 소리가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더구나
진짜 애들한테 떳떳한 어미가 돼야지 맘먹고는
이날까지 왔다. 글자 하나가 사람을 살린거여
넌 글 쓰는 사람이니께 가슴에 잘 새겨둬라
내 말을 믿으면 진짜 글쟁이고
안 믿으면 그 흔해바지 똑똑한 아들만 되는거고
근데 어미가 니들 놔두고 진짜 죽을 생각을 했겄냐?
이런 거짓부렁을 소설이라고 하는 겨
11. 눈물둑
큰애 너도 곧 쉰이다. 눈 밑에
검은 둔덕이 쪽밤만 하게 솟았구나
눈물 가두려고, 눈알이 둑을 쌓는 겨
아버지는 그 눈물둑이 얕았어야
속을음으로 억장 울화산만 키우다
일찍 숨보가 터져버린 거지
슬플 땐 눈물둑이 무너져라
넋 놓고 울어야, 본시 남자란 게 징인데
좀 징징거린다고 뉘 뭐라 하겄냐?
12. 전망
새들이 이제 사람도
*팡개질도 무서워 안 해
둥지가 자꾸 낮아지더구나
먹을 게 지천인데 누가 새 잡겄냐?
하수아비 대신 마네킹을 세놔도 허사여
밭두둑에 수건 벗어놨는데 까치가 쪼아대더구나
어미까치지 싶어 그냥 놔두고 왔다
낮은 충에 살면 밖에서 들여다본다고 싫어하던데
사람은 사람에게 비춰보며 살아야 해
들여다보면 좀 어떠냐? 제 짐에서 뭔 나쁜 짓을 그리 많이 한다고
로열층이 어떻고 경치가 어떻고 으스대지만
전망도 한두 번이면 텔레비전만도 못한 거여
사람만큼 좋은 전방이 어디 있겄냐?
새는 눈이 없어서 낮은 곳에 둥지를 틀겄냐?
진짜 전망은 둥지에서 내다보는 게 아니고
있는 힘 다해, 날개 펴 올라가서 보는 거여
*팡개질 : 팡개로 흙이나 돌을 주워 새에게 날려 새를 쫒는 것
13. 허풍
억지로 잡아끌어서 들어갔다만
혼자 농사짓는 여편네가 벌건 대낮에
영화관이 뭐다냐? 젊어 아버지하고 한 번 가본 적 있는데
줄거리는 기억에 없어야
그때만 해도 우리가 주인공이었으께 말이여
오늘도 하나 못 봤다. 눈치챘겄지만
내내 졸았으니 말이다.
어미 호강시키려고 어려운 짬 내서 식당까지 예약했는데 미안하다
니 덕분에 반백 년 만에 영화관에서 곤히 잤다고 한 말
섭섭해 말아라, 하품하다가 생각 없이 던진 것이니께
젊은 놈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갈비도 뜯었다고
동네방네 입방정 떨어놨으니, 안팎 홀아비들이
새아버지 예기 꺼내면 당취 모르겄다고 해라
푹 잤다고도 했다. 우습지?
칠순 자나니께 무술영화 주인공처럼 무서운 게 없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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