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181023-시 숲/권혁웅저 시 엮음집, 당신을 읽는 시간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8. 10. 24. 00:03

**쓸쓸/문정희**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 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글씨로 써 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 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그리고 옷을 벗고 무념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마음의 내과 /이병률**

 

 이말이 그 말로 들릴 때 있지요 그 말도 이 말로 들리지요 그게 마음이지요 왜 아니겠어요 몸피는 하나인데 결이 여렷인 것처럼 이 사람을 귀신이라 믿어 세월을 이겨야 할 때도 있는 거지요 사람 참 마음대로지요 사람 맘 참 쉽지요 궤짝 속 없어지지 않는 비린내여서 가늠을 불가하지요 두 개의 달걀을 섞어놓고 섞어놓고 이게 내 맘이요 저것이 내 맘이요 두 세계가 그르며 다투는 형국이지요 길이가 맞지 않는 두 개의 자이기도, 새벽 두 시와 네 시 사이이기도 하지요 써먹을데 없어 심연에도 못데리고 가지요 가두고 단속해봤자 팽팽히 와글대는 흉부의 소란들이어서 마음은 그 무엇하고도 무촌이지요

 

**아내의 잠/마종기**

 

한밤에 문득 잠 깨어

옆에 누운 이십년 동안의 아내

작게 우는 잠꼬대를 듣는다

간간이 신음 소리도 들린다

불을 켜지 않은 세상이 더 잘 보인다

 

멀리서 들으면 우리들 사는 소리가

결국 모두 신음 소리인지도 모르지

어차피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

그것 알게 된 것이 무슨 대수랴만

잠속에서 작게 우는 법을 배우는 아내여

마침내 깉어지는 당신의 내력이여

 

**대비/배한봉**

 

물은, 차마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났다

 

나무는, 차마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날 수 없어서 그 자리에 붘박였다

 

**해피 버스데이/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기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

 

**더딘 슬픔/황동규**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길이 나를 들어올린다/손택수**

 

구두 뒤축이 들렸다 닳을 대로 닳아서

뒤축과 땅 사이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공간이 생겼다

깨어질 대로 깨어진 구두코를 닦으며

걸어오는 동안, 길이

이 지긋지긋한 길이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나보다

닳는 만큼, 발등이 부어오르는 만큼 뒤꿈치를 뽈끈

들어 올려주고 있었나보다

가끔씩 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기운다는 건

내 뒤축이 허공을 딛고 있다는 얘기

허공을 디디며 걷고 있다는 얘기

이제 내가 닫는 것의 반은 땅이고

반은 허공이다 그 사이에

내 낡은 구두가 있다

 

**불주사/이정록**

 

내 왼어깨에 있는 절이다

절벽에 지은 절이라서 탑도 불전도 없다

눈코 문드러진 마애불뿐이다

귀하지 않은 아들 어디 있겠느냐만

엄니는 줄 한 번 더 섰단다

공짜라기에 예방주사를 두 번이나 맞혔단다

그게 덧나서 요 모양 요 꼴이 됐다고

등목해줄 때마다 혀를 차신다

보건소장이 아주 좋은 거라 해서

한 번 더 맞히려 했는데 세 번찌는 들켰단다

크는 흉터는 부처님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것 때문에 가방끈도 소총 멜빵도

흘러내리지 않아 좋았다 말씀드려도

자식 몸 버려놓은 무식한 어미를 용서하란다

인연이란 게 본래 끈 아닌가

내 왼어깨엔 끈이란 끈

잘 건사해주는 불주사라는 절터가 있다

어렷서부터 난 누군가의 오른쪽에서만 잔다

하면 내 인연들은 법당 마당 캅신이 아니겠는가

내 왼어깨엔 엄니가 지어주신

불주사가 있다 손들고 나서려고만 하면

물구나무서버리는 마애불이 산다

 

**이사/신혜정**

 

나 이사를 많이 하였다

이제 한 번 더 짐을 이사해야 할 일이 남았다며는

달팽이집으로 가려고 한다

달팽이집에 기거하면서

더듬이를 앞장 세워

깃발들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길가에 나무들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초록을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분홍을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하겠다

 

**겁난다/유안진**

 

토막 난 낙지다리가 접시에 속필로 쓴다

숨가쁜 호소 같다

 

장어가 진창에다 온몸으로 휘갈겨 쓴다

성난 구호 같다

 

뒤쫓는 전갈에게도 도마뱀꼬리가 얼른 흘려 쓴다

다급한 쪽지글 같다

지렁이도 배밀이로 한자 한자씩 써 나간다

비장한 유서 같다

 

민달팽이도 목숨 걸고 조심조심 새겨 쓴다

공들이는 상소 같다

 

쓴다는 것은

저토록 무모한 육필이란 말이지

몸부림쳐 혼신을 다 바치는 거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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