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노래/보들레르*
이윽고 우리는 싸늘한 어둠 속에 빠져 들리니
잘 가거라, 너무도 짧은 여름날의 발랄한 볕이여!
벌써 돌바닥 뜰 위에 장작 부리는
불길한 충격 소리 들려오는구나.
겨울은 온통 내 가슴에 사무쳐들리
분노와 증오, 전율과 공포, 노역은
그리하여 내 심장 북극지옥의 태양인 양,
한갓 얼어붙은 덩어리 되어지리
나는 몸서리쳐짐을 느끼며 장작 던지는 소리 듣노니
두들겨 세우는 단두대보다도 더 둔탁한 울림이여
내 가슴은 무거운 쇠망치를 얻어맞고
허물어지는 성탑과도 같다.
이 단조로운 충격에 내 몸은 흔들려
어디선가 관에다 서둘러 못질하는 듯
누굴 위해?-어제는 여름이었으나 이제는 가을?
흡사 죽은 자를 매장하는 종소리와도 같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 이제 곧 겨울이 오는 계절에 대한 쓸쓸하고도 끔찍한 심사를 충격적인 묘사로 표현. 최승자는 강렬한 이미지와 주제를 자기 식으로 소화 ‘개같은 가을이’, 기형도는 ‘빈 집’에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것으로 소화
*개같은 가을이/최승자*
개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같은 가을. -좋은 직유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긴가민가하는 상태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피어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주막집 대문 가까이 있는 방
나는 부스스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가을이 오는 시기는 항상 우울하고 후회가 되고 그래 개같은 가을, 그리우면서도 두려운 양가兩價의 감정/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이 엄습한다. ‘기억의 폐수가/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 관념과 사물을 동일시하는 3연 1~2행 보들레르 스타일. ‘어디까지 가야/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오는 가을의 여운을 조성
*일찍이 나는/ 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 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군말】‘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시인의 발언은 전통적인 여성 시인의 표현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였고,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는 존재였다는 시인의 진술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다. 이러한 자기 부정은 인간 존재에 대해 시인이 비극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 앞에 선 화자는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마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나도 너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절한 자기 인식을 가능하게 한 것은 ‘너=당신=그대’와 ‘행복’, ‘사랑’ 같은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사실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러한 존재의 부정을 통해 시인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실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실존(개인의 구체적 삶)이 존재(보편적 인간의 삶)보다 앞선다고 말했다.)
<참고> 시집 『이 시대의 사랑』 발문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존재한다. 그는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 그리하여 시는 어떤 가난 혹은 빈곤의 상태로부터 출발한다. 없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없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힘 또는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힘, 그것이 시이다. 그 부정이 아무리 난폭하고 파괴적인 형태를 띤다 할지라도 그것은 동시에 꿈꾸는 건강한 힘이다. 그리하여 가난과, 그 가난이 부정된 상태인 꿈 사이에서 시인은, 상처에 대한 응시의 결과인, 가장 지독한 리얼리즘의 산물인 상상력으로써 시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로써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 울 때에 같이 운다든가, 다른 사람들이 울지 않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울어 버릴 수 있다는 것뿐이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소위 가장 건설적인 일은 꿈꾸는 것이 고작이며, 그것도 아픔과 상처를 응시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부정의 거울을 통해 비추이는 꿈일 뿐이다.
-최승자 시인 프로필 ;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나(1952~)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서 배웠다.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 창작과 번역을 같이 해왔다. 2001년 이후 투병을 하면서 시작 활동을 한동안 중단하다 2006년 다시 시를 발표했다. 최승자는 현대 시인으로는 드물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김혜순 시인 이전 여류 촉망받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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