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19세기의 비가 내리면
목요일에 전화할게.
목요일,
유일한 목요일에는 전화할게.
오늘은 순교자들이 싫어져
자꾸 고개를 저었네.
어제부터는 모든 게 비대칭이야.
골목 모퉁이를 돌면 또 모든 게 새로워지는,
그런 마법을 아는,
중세의 여자를 만나고 싶네.
사랑과 햇빛을 위해서라면 부디
안락사를 허용해줘요.
밤거리를 걷다가 문득
영원한 음악 따위가 흐르지 않도록.
나는 단순한 벌레처럼 변신 중이고
나는 사라진 빗방울을 찾아 헤매네.
동그라미를 사랑해서
벌써 동그라미가 되어버린
무정한 여자에게는 전화를.
나는 무능력한 마법사,
모퉁이를 돌면 마법처럼
목요일은 나타나겠지.
순교자들이 싫어,
아홉 시 뉴스의 순교자들이 싫어,
나는 빗속에서 전화를 하겠지.
달콤한 목요일,
유일한 목요일에는 또
19세기의 비가 내리면
전선들
이장욱
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서로 통한다
전봇대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배선공이
어디론가 신호를 보낸다
고도 팔천 미터의 기류에 매인 구름처럼
우리는 멍하니
상공을 치어다본다
너와 단절되고 싶어
네가 그리워
텃새 한 마리가 전선 위에 앉아
무언가 결정적으로 제 몸의 내부를 통과할때까지
관망하고 있다
달려라 버스
내가 탄 7번 버스가 덜컹, 하는 순간
나는 완전히 7번 버스이다. 나는 3센티 상공에서
정확하게 내 몸을 의식하였다.
나는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무엇보다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순간에 꽃은 단 하나의 방향으로 피어나고
소년은 어느덧 다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하늘의 연기는 연기 아닌 것들로 변한다.
드디어 낯선 바람이 꽃과 꽃을 이어 길을 흔들 때
소년의 몸 안에서 맹렬히 피가 돌아 소년을 지울 때
하늘의 연기는 허공에 미세한 통로를 만들어
스스로를 소리 없이 삭제하였다.
이제 또 무슨 생각이 나를 되찾아
와와 달려가는 하굣길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7번 버스 종점,
나는 좀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하염없이 꽃 피우는 거리를 걸어갈 것이지만
이것은 결국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오후인 것이어서
몇 대의 버스는 네거리를
맹렬히 질주 중이다.
<여행자들>
- 이장욱
후포에 가자 / 후포에 가서 / 가장 단순한 표정으로 지상에 내리는 / 음악이 되자 / 사소한 흔들림들을 모아 수평선을 이루면 / 아지랑이처럼 늙은 고래들이 느리게 이동하는 곳 / 결국 우리는 후포에 가자
여행은 즐거워.
오늘은 개미들이 대열을 이루어 행진 중이예요.
본능은 향기롭고, 뜨거운 매미는 죽었고, 여름이에요.
내비게이터 위를 깜빡이며 이동하는 점. 여름의 내가 눈을 감자 겨울의 당신은 영원히 전방을 주시합니다. 우리는 나란히 떠났다가, 깜빡이며 돌아옵니다.
하지만 어지러워.
나는 무서운 속도로 자전하는 행성을 여행했네.
너무 오래 빙빙 돌아서 젤리가 된 고양이처럼
우리는 매일 미래에 닿았던 거지. 당신은,
내 사랑, 어디 있니?
짐승의 살이 위장에서 형체를 잃어가듯
나는 여행 중이고 자꾸 몸이 지워져.
내 죽은 여자의 아침을 따라.
러시아와 인도와 샴을 나는 다 돌아다녔어요.
쿠바에 가면 로맨틱한 혁명가들을 볼 수 있을까요?
아바나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에 데려다줘요.
거기서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아 목청껏 불러보겠어요.
쿠바는 쿠바, 아바나는 아바나,
그런데 오늘은 자꾸 다른 방향으로 머리카락이 자라. 내가 널 사랑했을까?
소년의 표정을 지우고 수많은 이발사들을 잊고 이제 마지막 일몰을 향해 머리카락은 자라네. 머리카락은 명랑해.
꿈과 또 꽃피는 침대가 사라지자 유일하게 창조적이지.
내게 비 내릴 때 네게 이상한 아침이 오고 내게 소중한 것이 없을 때 너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깜빡이고 내가 유물론자로서 시를 읽을 때 너는 마침내 마지막 여행을 결심했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우리는 만나겠지. 우리는 어디선가.
깜빡이며 이동하는 은하수가 블랙홀로 사라지는 장관을 본 적이 있어요? 그곳이 소실점일까요? 그 밤내 우리는 청평 호반을 걷고 있었잖아요.
먼지처럼
이장욱
나는 코끼리의 귀가 되어 펄럭거리고
너는 개의 코가 되어 먼 곳을 향하고
우리는 공기 중을 부드럽게 이동하였다.
활명수(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의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배경이 되어
무한히 지나갔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
우리는 어지럽고 아름다웠다.
먼지처럼
음악처럼
오늘은 누군가 성수와 뚝섬 사이에서 사라지고
누군가 병든 유태인처럼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누군가 박물관의 입구처럼 조용해지고
아침에는 추리 소설 속의 탐정처럼 깨어났다.
노련한 사서들은 언제나 음악의 비유를 경계했지만
우리는 미래의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나는 내일도 기린의 목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너는 모레도 하마의 입처럼 무거워졌다.
우리는 삼십 년 후에도 가득한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
잡담
나는 복도에서
나는 자판기 곁에서
나는 버스 안에서
분수처럼 흩어졌다
흩어져서
아무 곳으로나 스며들었다
나는 손톱이 자라는 속도와 함께,
지루한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짧은 침묵과 함께,
길을 걷다가 누군가 부른 듯하여
뒤를 돌아보는 시선과 함께,
그 시선이 가닿은 곳에서 마주친
지나가는 사람의 눈빛과 함께,
그 눈빛의 잊혀짐과 함께,
격렬하게 통화 중인 사내의 머리카락 끝에서
다시 머리카락 끝을 밀어 올리며
정교하게 성장하는 검은 빛 속으로,
문득 비 내리는 허공이 이루는
빗줄기와 빗줄기 사이의
수학적인 간격과 더불어,
저무는 하늘 저편에서
서서히 번져오는
어둠에 의해,
당신과 내가 주고받던
아주 짧고 떠올릴 수 없는 이야기들의
終局에는,
나는 버스 안과
나는 자판기 곁과
나는 보도블록 위에서
결국 분수처럼
식물성
이장욱
햇살이 비닐하우스처럼 드리워지자
우리들은 자란다
우리는 턱을 치켜들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리지만
누군가 이해할 수 없는 外國人처럼 묻지.
지금, 당신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네 입 속에서 기나긴 물관이 보여.
늙은 개가 허공에 코를 대고
머나먼 향기를 불러오듯
우리는 열심히 달리고
우리는 이동하지 않네.
꽃은 發生하지만 너는 한 번도
혁명을 믿어본 적이 없잖아.
뿌리는 지하를 향해, 줄기는 태양을 향해,
또 꽃은 정기적으로.
중력은 무한하다.
우리는 슬로 모션으로 생장하는
낙관주의자들.
추락하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내 친구들.
내 몸에도 꽃 피네.
나는 친구들이 피워 올린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외로운 짐승처럼
허공으로 뻗어간다.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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