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김경주/어느 유년에 외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4. 10. 22. 01:15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보는 일

 

 

 

                                                                 김경주

 

 

 

 

 

 

 바람이 구름 속에서 깊게 울린다 비가 오는데, 얼굴이 흘러 있는 자들이 무언가 품에

하나씩 안고 헌책방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책을 책장의 빈 곳에 쓸쓸하게 꽂는다

러곤 아무도 모르게 낡아가는 책을 한 권 들고 펼친다 누군가 남긴 지문들이 문장에

번져 있다 마음이 이곳에서 나귀의 눈처럼 모래 속을 스몄던 것일까 봉인해놓은 듯

마른 꽃잎 한 장, 매개의 근거를 사라진 향기에게서 찾고 있다 떨어져 나간 페이지

들이 책에 떠올라 보이기 시작한다 비가 오면 책을 펴고 조용히 불어넣었을 눅눅한 휘

람들이 늪이 돼 있다 작은 벌레들의 안구 같기도 하고 책속에 앉았다가 녹아내린,

작은 사원들 같기도 한 문자들이 휘파람에 잠겨 있다 나무들을 흔들고 물을 건너다가

휘파람은 이 세상에 없는 길로만 흘러가고 흘러온다 대륙을 건너오는 모래바람 속에도

누군가의 휘파람은 등에처럼 섞인다 나는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본다 마을을 바라보는 짐승들의 목젖이 박쥐처럼 젖어 있다 나

는 그 때 식물이 된 막내를 업고 어떤 저녁 위로 내 휘파람이 진화되어 고원을 넘는 것

을 보았다 아버지의 등 뒤에 숨어서 바라보던 밤의 저수지, 인간의 시간으로 잠들고 깨

어나던 부뚜막의 한기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다면 누이야 자전거를 세워두고 나는 너

보다 작은 휘파람을 불어보기도 했다 그런 때에 휘파람에선 어떻게 환한 아카시아 냄

새가 나는지 쇠속을 떠난 종소리들은 어떻게 손톱을 밀고 저녁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지 누

이야 지금은 네 딸에게 내가 휘파람을 가르치는 사위 쓸쓸한 입술의 냄새를 가진 바람들

이 절벽으로 유배된 꽃들을 찾아간다 절벽과 낭떠러지의 차이를 묻는다

 

 

 

          - 김경주 제 1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p.58, 랜덤하우스

 

피는 공중전화 / 김경주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조립식 벽 틈으로 스며 들어온 바람
흐린 백열등 속에도 눈은 수북이 쌓인다
오래 된 번호의 순들을 툭툭 털어
수화기에 언 귀를 바짝 갖다 대면
손톱처럼 앗! 하고 잘려 나갔던 첫사랑이며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
가슴에 고스란히 박혀 들어온다
작업반장 장씨가 챙챙 골목마다 체인 소리를
피워 놓고 사라지면 여공들은 흰 면 장갑 벗는다
시린 손끝에 보푸라기 일어나 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뿌리내린 실밥들 삐뚤삐뚤하다
졸린 눈빛이 심다만 수북한 머리칼 위로 뿌옇다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
라디오의 잡음이 싱싱하다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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