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190402-시의 여백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9. 4. 3. 00:47

***정희성 시집/시를 찾아서, 돌아 보면 문득-창비간 에서 발췌시 중심***

 

**사랑**

 

사랑아 나는 눈이 멀었다

멀어서

비로소 그대가 보인다

그러나 사랑아

나도 죄를 짓고 싶다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 설래듯

 

**애월**

 

들은 적이 있는가

달이 숨쉬는 소리

애월 밤바다에 가서

나는 보았네

들숨날숨 넘실대며

가슴 차오르는 그리움으로

물 미는 소리

물 써는 소리

오오 그대는 머언 어느 하늘가에서

이렇게 내 마음 출렁이게 하나

 

*북제주군에 있는 마을 이름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 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때늦게 싹이 튼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을 피울까 물라

아픈 꽃을 피울까 몰라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룰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따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하회河回에서**

 

저녁 무렵 만대루에 올라 바라보노라

병풍 같은 절벽 세상을 막아서고

강물은 마을을 둘러 흐르는데

이쯤에서 그만 나도 다리를 뻗고 싶다

저물어 깊어가는 강물을 바라보느니

어디선가 고인 古人의 글 읽는 소리

골 깊어 다시 돌아가기도 어려울 터

글공부나 할밖에 예서 달리 무얼 할까

 

**작은 밭**

 

평소 아이들 자라는 것만 보다가

퇴임하고 들어앉은 나에게

허구한 날 방구들만 지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아내가 불쑥 내민 호미 한 자루

하느님, 나는 손톱 밑에 흑을 묻혀본 적 없고

상추 한잎 이웃과 나눈 일이 없슴니다

아내가 얻어놓은 작은 밭이랑에

어떻게 아이들을 심을까요

내 서툰 호미질이

어린 상추싹을 다치게 할까 걱정입니다

 

**집에 못 가다**

 

어린 시절 나는 머리가 펄펄 끓어도

애들이 나 없이 저희들끼리만 공부할까봐 결석을 못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어머 저는 애들이 저만 빼놓고 재미있게 놀까봐 결석을 못했는데요

하고 깔깔댄다

늙어 별 볼일 없는 나는 요즘 그 집에 가서 자주 술을 마시는데

나 없는 사이에 친구들이 내 욕할까봐

일찍 집에도 못간다

 

**숲**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어둠 속에서**

 

빛 안에 어둠이 있었네

불을 끄자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냈네

집은 조용했고

바람이 불었으며

세상 밖에 나앉아

나는 쓸쓸했네

 

**흔적**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그림자만 남아 있다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2년인데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이 보낸

체납주민세 납부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곡동 어디 자식들 몰래 살아 계신가 싶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바닷가 벤치**

 

마음이 만약 쓸쓸함을 구한다면

기차 타고 정동진에 가보라

젊어 한때 너도 시인이었지

출렁이는 바다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그 위를 떠가는 흰 구름

그리고 바닷가 모래 위 작은 벤치에는

너보다 먼저 온 외로움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희망**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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