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시집/시를 찾아서, 돌아 보면 문득-창비간 에서 발췌시 중심***
**사랑**
사랑아 나는 눈이 멀었다
멀어서
비로소 그대가 보인다
그러나 사랑아
나도 죄를 짓고 싶다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 설래듯
**애월**
들은 적이 있는가
달이 숨쉬는 소리
애월 밤바다에 가서
나는 보았네
들숨날숨 넘실대며
가슴 차오르는 그리움으로
물 미는 소리
물 써는 소리
오오 그대는 머언 어느 하늘가에서
이렇게 내 마음 출렁이게 하나
*북제주군에 있는 마을 이름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 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때늦게 싹이 튼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을 피울까 물라
아픈 꽃을 피울까 몰라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룰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따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하회河回에서**
저녁 무렵 만대루에 올라 바라보노라
병풍 같은 절벽 세상을 막아서고
강물은 마을을 둘러 흐르는데
이쯤에서 그만 나도 다리를 뻗고 싶다
저물어 깊어가는 강물을 바라보느니
어디선가 고인 古人의 글 읽는 소리
골 깊어 다시 돌아가기도 어려울 터
글공부나 할밖에 예서 달리 무얼 할까
**작은 밭**
평소 아이들 자라는 것만 보다가
퇴임하고 들어앉은 나에게
허구한 날 방구들만 지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아내가 불쑥 내민 호미 한 자루
하느님, 나는 손톱 밑에 흑을 묻혀본 적 없고
상추 한잎 이웃과 나눈 일이 없슴니다
아내가 얻어놓은 작은 밭이랑에
어떻게 아이들을 심을까요
내 서툰 호미질이
어린 상추싹을 다치게 할까 걱정입니다
**집에 못 가다**
어린 시절 나는 머리가 펄펄 끓어도
애들이 나 없이 저희들끼리만 공부할까봐 결석을 못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어머 저는 애들이 저만 빼놓고 재미있게 놀까봐 결석을 못했는데요
하고 깔깔댄다
늙어 별 볼일 없는 나는 요즘 그 집에 가서 자주 술을 마시는데
나 없는 사이에 친구들이 내 욕할까봐
일찍 집에도 못간다
**숲**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어둠 속에서**
빛 안에 어둠이 있었네
불을 끄자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냈네
집은 조용했고
바람이 불었으며
세상 밖에 나앉아
나는 쓸쓸했네
**흔적**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그림자만 남아 있다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2년인데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이 보낸
체납주민세 납부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곡동 어디 자식들 몰래 살아 계신가 싶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바닷가 벤치**
마음이 만약 쓸쓸함을 구한다면
기차 타고 정동진에 가보라
젊어 한때 너도 시인이었지
출렁이는 바다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그 위를 떠가는 흰 구름
그리고 바닷가 모래 위 작은 벤치에는
너보다 먼저 온 외로움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희망**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연습방 > 시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0416-시의 여백 (0) | 2019.04.20 |
---|---|
190409-시의 여백 (0) | 2019.04.10 |
190326-시의 여백 (0) | 2019.03.28 |
190319-시의 여백 (0) | 2019.03.27 |
펌> 작가는 밖으로 나갈수록 안으로 들어가는 여행자/박양근 (0) | 2019.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