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190319-시의 여백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9. 3. 27. 01:15

**민들레 압정/이문재**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봄, 할미꽃/이인수**

 

어무이요

어여 일나이소

손 잡고 산보 나가입시더

꽃이 천지삐까리니더

 

**제비꽃에 대하여/안도현**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 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 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노랑제비꽃/박칠환**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노랑제비꽃 화분이다

 

**모란/박제영**

 

쓰잘데기 없이 떠 김지미가 와부렸어

형님 가지셩

육목단 열끝을 삼촌은 늘 김지미 궁뎅이라 불렀지라

어느 날 궁금해서 물었더니

예쁘면 뭐 하냐 그림의 떡인데 써먹을 데가 없는 걸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화투판에서 육묵단 열끝이 된 사연이지라

 

나이가 들면서 나도 제법 고스톱을 치게 되었는데

육목단 열끝이 들어올 때마다 당대의 여배우 이름을 부르곤 했지라

유지인이 와부렸네 장미희가 와부렸어

정윤희, 이미숙, 강수연, 최진실, 심혜진, 전도연

당대의 여배우들이 육목단으로 많이도 피고 졌지라

 

모란을 따라 삼촌의 봄날은 갔지라

그게 무에 대수간

갈테면 가라지라

 

미자가 왔네 옜다 니 해라

어제는 순자가 피었다 지고

오늘은 영자가 피었다 지고

동네 술집 마담들이 화투판에서 피고

육목단 열끝으로 피고 지면

 

모란을 따라 나의 봄날도 가겠지라

무에 대수간

갈테면 가라지라

 

**제비꽃/오탁번**

 

오종종한

제비꽃을 보면

그냥저녕

제비턱을 한

날랜

제비족이나 되어

낫낫한 홀어미 하나

홀려내고 싶다

 

**꽃이 지는 속도/마경덕**

 

봄비에 벚꽃이 진다고 뉴스가 열을 올린다

며칠만 더 버텨달라는 당부에 꽃의 속도가 들어있다

축제가 지고 있다는 쓸쓸한 저 말은

꽃잎으로 불을 켠 허공이 어두워진다는 것

 

한 해를 준비한 캄캄한 하늘이 며칠 흰빛으로 환하더니

서둘러 소등을 한다는 소식

 

비의 무게에 축 늘어진 나뭇가지

꽃이 지는 속도는 얼마나 빠를까

잎이 꽃을 밀어내는 시간을 계산하면

낙하의 속도가 나온다

허공과 지상의 간격

벚나무의 키만 한, 딱 그만한 거리가

꽃의 일생이다

발치에 그림자를 뉘어놓고 키를 잰 나무들은

봄의 길이를 알고 있다

 

바람의 옷깃을 잡으려고 몸부림치는 꽃잎들

허공을 ㄴ는 몇 초의 시간

추락의 두려움을 알기에 직선을 피해

포물선으로 날고 있다

바람의 등에 엎혀 시간을 벌고 있다

 

**오리五里/우대식**

 

오리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오리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오리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오리만 가면 반덜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오리만 가면

오리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것이다

 

**사월의 노래/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앍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해 든다

빛나는 꿈의 ㄱ메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러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고향을 멀이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정병근**

 

빤스만 주렁주렁 널어놓고

흔적도 없네

 

담 너머 다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 다 본다

한 접도 넘고 두 접도 넘겠네

 

빨랫거리 내놓아라 할 땐

문 쳐닫고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겨우내 빤스만 사 오았나

 

저 미친 년, 백주白晝에

낯이 환해 어쩔거나

오살 맞은 년

 

**동강할미꽃 4/이향지**

 

가장 고울 때 만났습니다

만나는 순간, 밥도 잠도 아픔도 다 잊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곳에, 그대로 두어라.

그래서 그곳에 그대로 두고 나만 돌아왔습니다

 

**목련 후기/복효근**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갈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바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행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꽃 좀 보세요/박제영**

 

벚꽃 흐드러졌다고 아내가 꽃구경 가잔다

꽃비가 내린다

꽃비에 젖었으니 누군들 속살을 내어주지 않으랴

꽃잎 샅은 속살들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봄은

환하다

 

환장할!

봄은 얼마나 야한가

 

속절없이 바람 든 속내를 들킬까 싶어

배고프다 그만 가자

딴청을 피워보는데

 

예쁘다! 저 꽃 좀 보세요

 

슬며시 손을 잡는 당신

꽃 좀 보라고 저 꽃 좀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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