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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7. 12. 23. 00:31

찬란한 슬픔의 봄일지언정

곽 흥 렬

 

   소설小雪, 대설大雪이 지나고 동지도 넘어갔다. 이제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소한을 앞두고 시절은 점점 더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렇게 겨울이 깊어 갈수록 봄을 향한 기다림은 간절해진다. ‘어서 이 칙칙한 무채색의 계절이 끝나고 화사한 연둣빛 새봄이 펼쳐졌으면. 그래서 한시 빨리 저 남녘으로부터 꽃소식이 전해 왔으면……하루에도 여남은 번씩 거실 통유리 창에 붙어 서서 화신花信을 기다리며 앞마당으로 눈길을 준다. 아무리 목을 늘이고 바라보고 바라보아도 봄은 아직 깨어날 기미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몸에서는 벌써부터 봄기운이 들썩거리건만 꽃나무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취해 있으니 마음이 조급증을 일으킨다.

   어릴 때는 사계절 가운데서 단연 겨울이 최고로 좋았다. 눈이 오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을의 고샅길을 쏘다니고, 얼음이 얼면 또래들과 냇가에서 썰매를 지치느라 정신이 팔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를 막아내기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입성이었지만, 그런 차림으로도 추위 같은 건 아예 잊고 지냈다.

   겨울 다음으로 좋아한 계절은 가을이었다. 내남없이 가난에 절어 있었던 시절, 어린 마음에도 그나마 먹을거리에 대한 걱정에서 놓여날 수 있게 되는 때가 가을이어서였다. 애써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서 주렁주렁 달리는 감이며 밤, 대추 같은 열매들은 어린 감성을 얼마나 넉넉히 부풀려 주었던가. 수확의 계절답게 곳간에 차곡차곡 쟁여져 가는 곡식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벌써 배가 불러왔다.

   그리고 그 다음은 여름이었다.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까맣게 탄 얼굴로 해종일 물속에 들어가 살다시피 할 만큼 여름나기는 마냥 신이 나고 행복에 겨웠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그다지 궁기를 모르고 지낼 수 있는 시기가 이 계절이었기 때문이다.

   사철 중에서 무엇보다 봄이 가장 싫었다. 보릿고개 넘기가 태산 넘기보다 힘들다는 말이 유행하던 때였으니 봄꽃 같은 눈요깃거리에 마음을 두는 것은 한낱 유한 계층의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특유의 길고 느릿한 곡조로 애상적인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뻐꾸기 소리가 봄날의 나른한 기분을 더욱 더 가라앉게 만드는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이제 한 해 두 해 세월의 더께가 쌓이다 보니 어린 날들의 정서와는 정반대로 되어 간다. 어릴 때는 제일 싫었던 봄이 거꾸로 제일 좋아지고, 어릴 때는 가장 좋았던 겨울이 도리어 가장 싫어졌다. 아니, 겨울철로 접어드는 것이 그냥 단순하게 싫은 정도가 아니라 은근히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흔히들 겨울을 겨울답게 만드는 것이 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눈 내리는 풍경이 시들해지는 걸 넘어서 눈 자체가 아예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어린 시절에는 한사코 자연의 이법에 역행하는 쪽으로 튀어나가려고 내면에서 쉴 새 없이 충동질을 했었다. 이제 한 겹 두 겹 나이테가 감겨질수록 육신이 나도 모르게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이 감지된다.

   해마다 봄이 오고 꽃들이 다투어 새 세상의 환희를 노래 부르는 시절이면, “민들레와 바이올렛이 피고, 진달래,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꽃,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사향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이라고 읊은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의 한 구절이 가만히  입가에 머문다. 그러면서 다시 주어진 봄 풍경에 살아 있음이 눈물겹도록 감사하게 다가오고, 가슴속에서부터 저절로 환희심이 솟구친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참 아이로니컬하게도 봄이 두고 기다릴 사이도 없이 금세 와 버리면 어쩌나 하는 야릇한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도 한다. 어쩌면 학창 시절 소풍을 가는 날 아침의 설렘 가운데 얼비치던, 풀어낼 수 없는 묘한 상실감 같은 감정과 비슷한 심리라고나 할까. 아리따운 여인의 자태 속에 이미 호호백발 노파의 영상이 내재해 있듯 화려한 봄꽃 안에 벌써 이욺의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는 까닭이다. 일찍이 김영랑 선생은 이 무상한 영허盈虛의 이법을 깨달았기에 흐드러지게 펼쳐진 봄을 두고서 찬란한 슬픔이라고 읊었던가 보다.

   사실, 젊은 날에는 대체 그런 억지소리가 어디 있느냐며 적이 마뜩잖게 여겨졌었다. 한낱 배부르고 등 따스운 사람의 호사스러운 말장난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제 내일모레면 갑년을 맞이하게 되는 이 나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선생의 깊은 강물 속 같았을 심사가 느껍도록 헤아려진다. ! 무릎을 치게 만드는 그 기막힌 역설이라니…….

   그렇지만 비록 먼 산 한 번 쳐다볼 사이에 이울고 마는 찬란한 슬픔의 봄일지언정, 겨울이 깊어 가면 벌써부터 봄을 고대하는 마음이 내면에서 충동질을 일으킨다. 그건 아마 틀림없이 나이를 속이지 못하는 세월의 무게 때문이지 싶다.

   상념에 젖은 채 다시 창밖을 응시한다. “봄이다하고 나직이 읊조리며 스스로에게 봄소식을 부르는 최면을 건다. 순간, 앞마당에 아롱아롱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마음속에서는 이미 새싹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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