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꽃 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 나태주 시집 <멀리서 빈다> 수록
풀꽃 3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 봐
참 좋아
- 나태주 시집 <풀꽃 향기 한 줌> 수록
선물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 구절이면
한아름 바다를 안는
기쁨이겠습니다
+ 선물
세상이 내게 준 선물은
내가 쓰는 나의 시
내가 세상에게 주는 선물도
내가 남기는 나의 시
세상이여 영원하거라
내가 남긴 시여 오래 살거라
이 세상은 참 좋은 곳이란다.
(나태주·시인, 1945-)
+ 선물
받는 것은 될수록 줄여서 받고
주는 것은 될수록 늘려서 주리
그대 내게 주시는 것
비록 작더라도
큰 상으로 알고 받겠으니
내가 주는 것 비록 크더라도
작은 별로 바꾸어 받으시라.
(나태주·시인, 1945-)
당신 안의 여자
사람 바빠 죽겠는데
열심히 집안일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전화를 거시는 당신
지금 창밖에 눈이 날리고 있다고
꽃이 피어났다고
더러는 달이 떴다고
전화로 불러내시면
도대체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요?
지금 설거지하고 있는 중인데
지금 김치를 썰고 있는 중인데
마음이 울적하다고
보고 싶다고 자꾸만 그러시면
도대체 날더러 어쩌라는 건가요?
부디 당신 안의 그 여자와
사이좋게 잘 지내기 바래요
자주 울적하고
자주 쓸쓸하고
자주 울먹거리는 변덕쟁이 그 여자
새파란 입술을 가진 그 여자와
봄이 와도 울지 말고 쓸쓸해하지 말고
부디 잘 살기 바래요.
- 『문학청춘』(2012. 여름호)
**
나태주 시인을 여러 해 전에 대전의 모 자리에서 뵌 적이 있다. 그 때 시를 여쭸더니, “시가 뭐 별 거 있나요? 그냥 모시고 사는 거지요.” 그러시는 거다. 짧지만 긴 여운의 말씀이었다. 그 후로 시를 쓰는 일이 곧 하늘을 모시고, 땅을 모시고, 사람을 모시는 일이겠다. 시인이란 곧 하늘을 모시고 땅을 모시고 사람을 모시는 자이겠다. 그런 생각을 줄곧 했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전문) 나태주 시인의 이 짧은 시 한 편에 “모신다(侍)”는 그의 마음이 온전히 담겼다는 생각을 줄곧 했었다. 그렇구나 시(詩)가 곧 시(侍), 모심이구나. 그런 생각.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 생각을 잊고 있었는데, 오늘 나태주 시인의 시, 「당신 안의 여자」를 읽으면서 다시 그 생각을 떠올린다.
나태주 시인의 시편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시도 쉽고 단순하다.(쉽고 단순함이 시를 단단하게 만들고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법. 그것이 시가 이르러야 할 경지 아니던가.) 늙은 시인이 늙은 아내를 보면서 아내의 마음 속을 상상하고(1~3연), 그런 아내에게 자신의 바람을 전한다(4연). 아내를 “모시는” 노시인의 마음이 애틋하고 지극하다. 아내라는 여자가 있다. 아니 “아내라는 여자”와 “아내 속의 여자”가 있다. 그러니까 남편들이여 잘 살펴 모시라. 당신과 지금 한 이불 덮고 자는, 당신의 식탁을 준비하고 당신의 출근을 준비하는 아내라는 여자 속에는 먼 옛날 연애시절 ‘자주 울적하고’ ‘자주 쓸쓸하고’ ‘자주 울먹거리는 변덕쟁이 그 여자’가 ‘새파란 입술을 가진 그 여자’가 여전히 “쓸쓸하게 울먹거리며”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부디 당신 안의 그 여자와/ 사이좋게 잘 지내기 바래요’ ‘봄이 와도 울지 말고 쓸쓸해하지 말고/ 부디 잘 살기 바래요.’ 이 절절한 시심(詩心) 앞에서, 시심(侍心) 앞에서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받들어 모실 수 밖에.
- <<시와경계>> 2012 가을호
**그립다**
쓸쓸한 사람,
가을에
더욱 호젓하다
맑은 눈빛,
가을에
더욱 그윽하다
그대 안경알 너머
가을꽃 진자리
무더기, 무더기
문득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
그립다.
**행복**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내가 너를 **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부탁/나태주**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라.
사랑아
목소리 들리는 곳 까지만 가거라.
돌아오는 길 잊을까 걱정이다
사랑아
**안부**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편지**
하루의 좋은 시간을
다른 곳에 다 써 먹고
창문에 어둠 깃들어서야
그댈 생각해 낸다.
그댈 생각하고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너무 섭섭히 생각 마시압소
**여자**
여자라는 나무를
가슴 안에 숨겨서
키우는 날부터
남자는
몸이 야위어간다
어떤 여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남자는 세상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나는 목숨이 된다.
**꽃 피는 전화**
살아서 숨 쉬는
사람인 것만으로도 좋아요
그럼요. 그럼요.
거기 계신 것만으로도 참 좋아요
그럼요. 그럼요.
오늘은 전화를 다 주셨군요.
배꽃 필 때 배꽃 보러
멀리 한번 길 떠나겠습니다
**눈부신 세상**
멀리서 보면 때로 세상은
조그맣고 사랑스럽다
따뜻하기까지 하다
나는 손을 들어
세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자다가 깨어난 아이처럼
세상은 배시시 눈을 뜨고
나를 향해 웃음 지어 보인다.
세상도 눈이 부신가 보다.
**기도 1**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때때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는 말씀이에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더불어 약과 더불어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장롱에 비싸고 좋은 옷도 여러 벌 가지지 못한 여자예요.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는 여자이지요.
자기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귀퉁이 가지지 못한 여자예요.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는 숙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돈을 아끼느라 꽤나 먼 시장 길도 걸어 다니고
싸구려 미장원에만 골라 다닌 여자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잘 들어 응답해주시는 하나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다음은 이 시에 화답하여 시인의 아내가 쓴 시.
너무 고마워요
남편의 병상 밑에서 잠을 청하며 사랑의 낮은 자리를 깨우쳐주신 하나님,
이제는 저 이를 다시는 아프게 하지 마시어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죄로 한 번의 고통이 더 남아 있다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것이라면, 이제는 제가 병상에 누울게요.
하나님, 저 남자는 젊어서부터 분필과 함께 몽당연필과 함께 산,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시에 대한 꿈 하나만으로 염소와 노을과 풀꽃만 욕심 내온 남자예요.
시 외의 것으로는 화를 내지 않은 사람이에요.
책꽂이에 경영이니 주식이니 돈 버는 책은 하나도 없는 남자고요.
제일 아끼는 거라곤 제자가 선물한 만년필과
그간 받은 편지들과 외갓집에 대한 추억뿐이에요.
한 여자 남편으로 토방처럼 배고프게 살아왔고,
두 아이 아빠로서 우는 모습 숨기는 능력밖에 없었던 남자지요.
공주 금강의 아름다운 물결과 금학동 뒷산의 푸른 그늘만이 재산인 사람이에요.
운전조차 할 줄 몰라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남자예요.
승용차라도 얻어 탄 날이면 꼭 그 사람 큰 덕 봤다고 먼 산 보던 사람이에요.
하나님, 저의 남편 나태주 시인에게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좀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아름다운 시로 당신 사랑을 꼭 갚을 사람이에요.
시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는 원래는 줄바꿈 없이 된 산문시이다.
이 시는 2013년 간행된 <한국대표명시선 100 나태주 멀리서 빈다>(시인생각)에
수록되어 있는데 인터넷 상에서는 이 시를 부분 부분 변형한 것들이 나돌고 있다.
그리고 시인의 아내가 쓴 답 시
그런데 이 신문에 실린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는 내가 위에 적은 시와 다르다.
내 생각에는 신문에 난 시인의 아내가 쓴 답시라는 것도 그 출처가 의심스럽다.
다만 시인이 아팠다는 것은 사실로 <화이트 크리스마스> 시에 이렇게 적혀있다.
...
아내는 그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이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이다.
**여자**
아무리 고운 여자라도
사랑해 주지 않으면
천박한 여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은 그대가
그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기념일**
모름지기 하루 하루를
기념일로 생각하며
살아 갈 일이다
오늘은 모처럼
비가 오신 기념일
산의 나무와 풀들이 비를 맞고 신이 나서
새로이 숨을 쉬면서 손을 흔들며
내게 눈짓을 보내오지 않는가
오늘은 비 온 기념으로 퇴근길에
나나 무수꾸리의 음반이나 하나 사고
영화나 그럴 듯한 것으로 한 편 보아야겠다
'연습방 > 시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지개/워스워드 (0) | 2016.01.17 |
---|---|
160113 나 지금 떨고 있니 (0) | 2016.01.15 |
나룻배와 행인/한용운 (0) | 2016.01.07 |
우리 집 불쏘시개 (0) | 2016.01.03 |
[스크랩] 2016년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모음 (0) | 2016.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