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약속**
문정희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페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 있는 시계의 저서전이 아니다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약속이 '미친 약속'인 것은 '사랑의 영원성'이란 무릇 사랑의 '조변석개의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그렇고 계절마다 모습을 바꾸는 감나무가 그렇듯, 사랑이란 얼굴과 모습을 마꾸어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어떤 것이다.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란 사랑의 실체를 사랑으로 간주하는 흙의 약속, 사랑의 정념을 사랑으로 간주하는 불의 약속이다. 그러나 바람의 시인, 바람둥이 시인의 약속이란 저 끊임없는 물의 표현형식처럼 조변석개할 것이다. 그것이 그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나무와 나는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이 무한한 변화야말로 그가 사랑을 실천하는 형식이며, 그는 그렇게 해서 마침내 폐허에 이른다. 춤이 폐허에 이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춤이 허공을 품는다는 뜻이며, 시간의 형식이라는 뜻이며,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폐허는 허공에 몸을 내준 건축물이다. 춤은 그렇게 바람(허공)을 제 안의 일부로 포함한다. 춤은 동작의 예술이므로 시간성에 속박되어 있다. 그것은 무소성을 특징으로 갖지만 무시간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춤은 시간에 얹혀야 비로소 현현된다. 모든 변화의 끝은 폐허이므로 춤은 무한히 폐허를 향해 간다. 무한히 가므로, 그것은 종국, 긍극, 파국에 이르지 않는다. 차라리 끝자리에서 마주치게 될 폐허를 현재에 끌어당겨, '시시각각'폐허를 현현시킴으로써 그것을 연기(延期)하는 형식이 춤이라고 하는 것이 사정에 맞는다. 그것은 미완이고 제한적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무한하다. 시인이 사랑의 실패와 슬픔과 열정을 말하되, 사랑의 완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문정희 시집 '카르마의 바다', 154~156쪽 권혁웅 시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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