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20181204 시숲-문태준 시집/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발췌시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8. 12. 5. 00:23

인물

문태준 시인, 방송PD
출생
1970년경북 김천시
소속
불교방송 프로듀서
학력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외 1건
데뷔
1994년 문예중앙 등단
수상
2014 제8회 서정시학 작품상  외 6건
2018 동리목월문학상 시 부문 수상
경력
불교방송 프로듀서  외 1건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

 

내 어릴 적 어느 날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랗게 익은 뭉뚝한 노각을 따서 밭에서 막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 안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를 떠내셨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곡식을 까부르듯이 키로 곡식을 까부르듯이 시를 외셨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밭에 자라 오르던 보리순 같은 노래였습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가 울렁출렁하며 마당을 지나 삽작을 나서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석류꽃이 피어 있었고 뻐꾸기가 울고 있었고 저녁때의 햇빛이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시를 절반쯤 외시곤 당신의 등뒤에 낯선 누군가가 얄궃게 우뚝 서 있기라도 했을 때처럼 소스라치시며

남세스러워라, 남세스러워라

당신이 왼 시의 노래를 너른 치마에 주섬주섬 주워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몰래 들은 어머니와 누나와 석류꽃과 뻐꾸기와 햇빛과 내가 외할머니의 치마에 그만 함께 폭 싸였습니다

 

*천수 ;

*삽작 ;

 

**존재의 뒤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은

뒤편을 감싸 안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뒤편에 슬픈 것이 많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마치 비오기 전 마당을 쓸 듯

 

그의 뒤로 돌아가

뒷마당을 정갈하게 쓸어주는 일이다

 

**겨울달**

 

꽝꽝 얼어붙은 세계가

하나의 돌멩이 속으로 들어가는 저녁

 

아버지가 무 구덩이에 팔뚝을 집어넣어

밑동이 둥글고 크고 흰

무 하나를 들고 나오시네

 

찬 하늘에는

한동이의 빛이 떠 있네

 

시레기 같은 어머니가 집에 이고 온

저 빛

 

*제목 겨울달을 한번도 글씀없이 출중한 이미지화

 

**가을날**

 

아침에 단풍을 마주 보고 저녁에 낙엽을 줍네

오늘은 백옥세탁소에 들러 맡겨둔 와이셔츠를

찾아온 일 밖에 한 일이 없네

그러는 틈에 나무도 하늘도 바뀌었네

 

**호수**

 

당신의 호수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한 바퀴 또 두 바퀴

 

호수에는 호숫가로 밀려 스러지는 연약한 잔물결

물 위에서 어루만진 미로

이것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을비 낙숫물**

 

홍천사 서선실(西禪室 ) 층계에

앉아 듣는

가을비 낙숫믈 소리

 

밥 짓는 공양주 보살이

허드렛물로 쓰려고

처마 아래 놓아둔

찌그러진 양동이 하나

 

숨어 사는 단조로운 쓸쓸한

이 소리가 좋아

텅 빈 양동이처럼 앉아 있으니

 

컴컴해질 때까지 앉아 있으니

 

흉곽에 낙숫물이 가득 고여

 

이제는 나도

허드랫물로 쓰일

한 양동이 가을비 낙숫물

 

**한 종지의 소금을 대하고서는**

 

그릇에 소금이 반짝이고 있다

 

추운 겨울 아침에

목전(目前)에

시퍼렇게

흰 빛이

내 오목한 그릇에

소복하게 쌓였으니

 

밤새 앓고 난 후에

말간 죽을 받은 때처럼

 

마음속에 새로이 생겨나는 시를 되뇌듯이

박토(薄土)에 뽀족이 돋은 마늘 촉을 보듯이

 

**꽃들**

 

모스크바 거리에는 꽃집이 유난히 많았다

스물네시간 꽃을 판다고 했다

꽃집마다 ' 꽃들'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고 순한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꽃들'이라는 말의 둘레라면

세상의 어떤 꽃인들 피지 못하겠는가

그 말은 은하처럼 크고 찬찬한 말씨여서

야생의 언덕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의 보살핌을 보았다

내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을 두루 덥히듯이

밥 먹어라, 부르는 목소리가 저녁연기 사이로

퍼져나가듯이

그리하여 어린 꽃들이

밥상머리에 모두 둘러앉는 것을 보았다

 

**먼곳**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았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

먼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환한 등불

남을 온기

움직이는 별

멀리 가는 날개

여러 계절 가꾼 정원

뿌리에게는 부드러운 토양

풀에게는 풀여치

가을에게는 갈잎

귀엣말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저녁

서로의 바다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파도

고통의 구체적인 원인

날마다 석양

너무 큰 외투

우리는 서로에게

절반

그러나 이만큼은 다른 입장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만일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창백한 서류와 무뚝뚝한 물품이 빼곡한

도시의 캐비닛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맑은 날의 가지에서 초록잎처럼 빛날텐데

집밖을 나서 논두렁길을 따라 이리로 저리로 갈 텐데

흙을 부드럽게 일궈 모종을 할 텐데

천지에 작은 구멍을 얻어 한 철을 살도록 내 목숨도 옮겨 심을 텐데

민들레기 되었다가 박새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비바람이 되었다가

나는 흙내처럼 평범할 텐데

 

**사귀게 된 돌**

 

돌을 놓고 본다

초면인 돌을

사흘 걸러 한 번

같은 말을 낮게

반복해

돌 속에 넣어본다

처음으로 오늘에

웃으시네

소금 같은

싸락눈도 흩날리게

조금

돌 속에 넣어본다

 

**사랑에 관한 어려운 질문**

 

너는 내게 이따금 묻네

너와 나의 관계를

그것은 참 어려운 질문

 

그러면 나는 대답하네

나란히 걸어가면서

 

나는 너의 뒷모습

나는 네가 키운 밀 싹

너의 바닷가에 핀 해당화

 

어서 와서 앉으렴

너는 나의 기분 위에 앉은 유쾌한 새

 

나는 너의 씨앗 속에

나는 너의 화단 속에

 

나는 너를 보면

너의 얼굴만 떠올리면

산나무 열매를 본 산새처럼 좋아라

 

그러면 너는 웃네

분수 같은

뒷모습을 보여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