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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6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6. 1. 2. 11:17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생일 축하해 / 안지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199286일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심사평] 최종심까지 올라온 50여 편의 시를 읽고 느낀 점은 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두루뭉수리여서 쓴 사람 혼자만 읽고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할 시가 많았다."이전의 이후의 반물질과/ 무기체의 감각/ 물렁뼈에 속하는 밤/ , (), 현실/ 가느다랗게 흐트러져가는 형상에 대한/ 신뢰는 얼마나 대단한가."(이현정 '벽에 걸어놓은 외투는 살아 있다' 부분)

 

한 예에 불과하지만 현란한 기교가 난무하고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산문성이 두드러진다. 다양성을 긍정한다 해도 지나칠 정도로 관념적이다. 이는 서정과 구체에 뿌리를 내린 비관념적 소통의 시는 이미 낡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는 낡았든 새롭든 소통의 통로를 통해 써야 한다. 그동안 한국 시단은 뒤틀린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구축된 불통의 시를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방치해왔다. 행과 연 구분을 하지 않는 산문 형태의 시와 관념적 불통의 시가 현대시의 미래라고 여기는 잘못된 현상이다.

 

구어체로 이루어진 당선작 안지은의 생일 축하해는 당선작이 될 만큼 작품으로서 우수성이 탁월했다기보다는 소통 가능한 시가 그래도 이 시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일 축하해는 삶과 죽음을 동질 관계로 인식한 바탕에서 쓴 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일상의 순간에 만나 깊은 애증의 대화를 나눈다. 죽음이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이라는, 기일이 생일이고 생일이 바로 기일이라는 이 역설적 인식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지며 그 언어가 지닌 구체의 본질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정호승, 문정희)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 조상호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혀가 있다 행려병자의 시체 같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그림자, 달은 빙산이 되어 은빛을 풀어헤친다 물빛을 깨고 비치나무 냄새 번져오는 젖을 희끗희끗 빤다 안개, 서늘한 빗방울, 물방울 띄워올린다 뿌리가 부풀어오른다 물거품처럼

 

웅웅거리고 부서지고 내장처럼 고요 쏟아져 내리고 내려야 할 역을 잃고 흘러가는 페름 행 전신주 흰 눈송이들 백야의 건반을 치는 사내 -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 길고 가는 손가락 갈라지고 떠도는 핏방울 소용돌이 변두리로 나를 싣고, 창 밖 쁘이찌 야흐 행 마주보며 또 길게 늘어나고 민무늬 토기처럼 얼굴 금이 가고 스쳐가는 가, 가문비나무 그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이는 시간 산란하는 밤의 시작을 경계를 지나 나는 또 바라보고 있고

 

마젤란 펭귄들 발자국 소리 울음 아, 미역줄기처럼 늘어지고

 

움푹 파인 자국, 발자국들, 혀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 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종종 걸어 나오고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

 

1976년 전북 고창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 재학

 

[심사평]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4편은 상상력으로 시를 끌고 간다. 은유된 언어의 머뭇거림과 확장, 빠른 질주와 멈춤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시는 마치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처럼언어로 만든 점과 선, 리듬으로 시에 여러 개의 경계를 설정한다. 동시에 언어적 상상으로 세상을 더듬어 나가고, 더불어 떠나고, 정신의 세계를 어루만진다.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음운과 음운들이 서로 조응하면서 달려간다. 시의 입술을 달싹여 저 마젤란 펭귄이 사는 곳까지 뿌리를 내리며 가는 것이 아마도 이 시인의 식물학이리라. 논의 끝에 응모작 5편 모두 고른 시적 개성과 성취를 가진 점을 높이 사서 입과 뿌리에 대한 식물학을 당선작으로 선했다.(황현산, 김혜순)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족 / 정선희

 

공손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향해 규칙적으로 다가갔다

흑백으로 갈라지는 길들이 뒤섞이더니

우리 사이는 점점 간격이 사라졌다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다는 것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입 안에선 쉬지 않고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위험했다

돌을 던지고

끝까지 서로를 모른 체하고 싶었다

길이 팽창하고

수거함엔 깨어진 얼굴이 가득하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한번 시작한 길은 멈출 줄 몰랐다

 

1961년 경남 거창 출생

 2011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수상

 

[심사평] 당선작 가족은 전언의 구체성과 깔끔한 표현, 그리고 착상과 비유의 과정이 안정된 역량을 보여주었다. 이 시편은 규칙적으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맹목과 위험을 동시에 지닌 관계로 가족을 파악한다. 물론 이러한 파악이 정신희씨만의 개성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당선작은 그러한 파악을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표현에서 보이는 긴장과 예각적 균열을 통해 보여주고, 나아가 의 뒤섞임, 팽창, 멈출 줄 모르는 질주의 형상과 그것을 어울리게 하면서 서정적 구체성과 투명성을 동시에 살려주는 데 성공하였다.(정호승, 유성호)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위험수목 / 노국희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에 앉아있어

긴 오후가 지나가도록

지금 나뭇잎 한 장이 세상의 전부인

왕개미 옆에서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헤프게 구걸도 해보았다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

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

알록달록 실패들을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들고

저기서 당신이 걸어온다

마른 생선 하나를 내어주고는

가던 길을 간다

비릿한 기억이 손 안에서 파닥거린다

목이 없는 생선이 마지막에 삼킨

말들이 마른 비늘로

바스러진다

낡은 허물 위로 매미소리가 내려온다

울어본 기억만 있고

소리를 잃은 말들이

그림자 속에서 가지를 뻗는다

 

1978 전남 목포 출생

이화여대 물리학과 졸업

 

[심사평] 과장이나 엄살이 없이 기억과 상처를 다루고 있는 위험 수목은 구도에 있어서는 안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과감한 언어 운용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울어본 기억만 있고/소리를 잃은 말들과 같은 긴장감 있는 상상력이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같은 도전적인 문장에 실려 전개되고 있다. 취의와 언어 운용 능력에서 안정감과 패기가 함께 드러나고 있어 짧지 않았을 시 쓰기의 이력에 신뢰감을 갖게 한다.(김소연, 조강석, 황인숙)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스티커 / 이명우

 

대문에 붙어있던 스티커를 뜯다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붙는 스티커를 뜯다가

스티커 뜯기를 멈추고 산동네를 떠났다

멈추고 떠날 때는 다 지운 것이어서

지운 것은 없는 것이어서

없는 여기 산동네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 몰랐다

 

대문을 겹겹이 도배한 스티커 화려하기조차 했다

긁히고 찢긴 조금도 아물지 않는 가업

허파와 심장과 위장이 모두 철대문에 붙어

겨울 냉기를 고스란히 빨고 팽팽해졌다

 

추락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력서를 쓰고 찢고 쓰고 찢었던 것

부도난 회사의 대표였던 이력은

지급기일을 넘긴 어음처럼 휴지였던 것

부도를 막기 위해 오래전에 빌린 사채가 펄럭이며 휴지를

산동네 꼭대기까지 얼마나 난타해댔던가 

 

골목을 돌며 전봇대 기둥과 자주 부딪친다

골목에는 늘 똑같은 소리로 이자가 와 달라붙는다

눈치 없는 거미줄에 발걸음에 와 걸린다

발이라도 와 걸어주는 이것이 거미줄의 눈치

 

잠만자는직장여성환영 오십세이상알바모집 선원모집

배달부즉시출근가능 일수당일대출 신용불량자도대출

 

얼어붙은 전봇대를 덮이는 환영, 가능, 대박,

대문에 붙어서 스티커를 뜯어내고 있는 아들이 보인다

컴퓨터 게임 대신 싫증 모르는 스티커 뜯기 놀이

경첩이 떨어지려는 대문을 어서 받쳐보려는데

 

어제까지 떼어낸 적색 신불자대환영 스티커가 

어린 아들의 등에 세습처럼 붙어 있다

 

1959년 경북 영양 출생. 영양고 졸업.

현재 서울에 살며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음.

 

[심사평] 시의 응축적인 구성력, 개성적인 상상력, 이미지화의 능력, 그리고 리듬 의식이 잘 융합된 빛나는 별이 될 작품을 골라내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런데 고단한 오늘의 삶을 무리 없이 현실감 있게 이미지화한 이명우의 '스티커'가 심사위원 모두가 공감하여, 이를 당선작으로 밀었다.(남송우, 박남준, 안상학)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둥근 길 / 문귀숙

 

허풍빌라에서 내린

수백억 상속녀가 떨어뜨리고 간 

셀 수 없는 동그라미의 말들 

깔깔 거리다 휘청거리며 사라졌다

꽃뱀의 뱃속 같은 골목을 후진으로 

나오는 오늘 일진은 구부러진 끗발이다

금요일을 발광하는 네온사인을 비켜선

흐린 그림자 하나, 번쩍 손을 들었다

뒷자리에 앉자마자 웅얼거리는 목소리

백미러로 읽어야 하는 목적지가 

번져 읽을 수 없다

붉은 신호등 하나를 넘으며 자정의 경계를 넘었다

어떤 넋두리도 용납되는 할증의 시간

갈림길 마다 좌회전을 외치며 더 흐려진 그림자

젖은 넋두리에 수몰된 길을 

재탐색하라고 내비가 얼굴을 붉힌다

붉은 기운이 부족한 사납금만큼 미터를 올리고

대낮처럼 환한 불면의 광장을 지나고

늙은 벚꽃나무가 떨어뜨리는 흐린 시간을

지나 돌고 돌아도 이어지는 길

더 이상 택시로는 갈 수 없는 길

내비가 멈췄다

그림자의 손가락 끝에 만월이 걸렸다.

 

1964년 전남 진도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518문학상 동화 당선

 

[심사평] 은 시는 음악성(가락리듬)과 회화성(그림이미지)을 잘 갖추되 삶을 이끌어 올리는 힘이 엿보여야 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는 있지만 보지 못하는 그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와 함께 삶을 눈뜨게 만드는 아픔의 힘(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성 혹은 카타르시스의 힘이라고 말했다)'이 있어야 한다. 문귀숙 씨는 전체적으로 작품의 구성이 탄탄하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시적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시를 밀어 올리는, 끌고 가는 힘(에너지) 그리고 시적 의지가 좋았다. 음악성과 회화성 그리고 민요정신(Ballad Esprit)을 두루 갖춘 점이 크게 사줄만했다. 우리시대를 깊이 있게 통과하는 담론을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동시에 보여주면서 정진하기를 기대해본다.(김준태)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한상록

 

보십시오. 내게 빈 하늘을 열어

가벼운 마음 옷차림으로 흙을 밟게 하십시오

어디선가 두엄 지피는 향내 그윽하고

새살 돋는 들풀의 움직임 간지럽지 않습니까

돌아오지 않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꿀벌의 잉잉거림 속에 묻어오고

겨우내 강을 건너지 못했던 나무들의 희미한 그림자가

아지랑이 실핏줄로 살아나지 않습니까

잃은 것이 있다면 내 뜰로 와서 찾으시지요

이제 내 뜨락에 샘을 내므로

흩어진 목숨붙이들 찾아 모으려 합니다

바람만 드나들던 수족관을 가셔내고 맑은 수면에다

튀어 오르는 날빛 지느러미를 풀어놓으면

찰랑거리는 햇빛을 입고 내 생의 물보라 아름다울 겁니다

옥상에 내어걸린 빨래 나날이 눈부시어가고

누군가가 돋움발로 벗어붙힌 몸을 넘겨다보면

산록의 묵은잠을 흔들어 놓을

아스라한 진달래향 더욱 곱지 않겠습니까

저 만치 다가오는 나무들의 길이 보이고

새순같은 배꼽을 드러낸 개구쟁이 아들놈

동화 속의 악당을 찾아 타앙 탕 말을 달리면

그 길목을 따라 몇굽이의 강이 흘러서

우리의 얼어붙은 꿈도 촉촉이 적셔지지 않겠습니까

 

[심사평] 의 인상은 첫째 안정감이다. 들쭉날쭉하지 않다. 재주 부리지도 않는다. 언어에 무리가 생기는 일이 드물었다. 진부한 표현이 한두 군데서 걸렸으나 작품 전체의 평상심을 그다지 거스르지 않아서 다행이다.(고은/시인)

출처 : 문학과지성
글쓴이 : Jayb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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