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統營/백석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아직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란과 자야, 그리고 나타샤
1939년 늦가을, 스물여덟 살의 젊은 시인은 경성에서 만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게 됩니다. 바로 백석이다, 차창가에 펼쳐지는 드넓고 을씨년스러운 만주벌판은 가도 가도 반복되는 풍경을 보여준다, 반복되는 풍경은 내면을 응시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의 눈에는 차창의 풍경에 두 여인의 얼굴이 겹쳐진다. 바로 란蘭과 자야子夜라는 여성이다. 부모의 강권으로 시인은 20대에 이미 세 명의 아내를 두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란과 자야뿐이었다. 1935년 6월, 경성의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던 스물네 살의 백석은 통영출신 이화여고 학생 란을 만나게 된다. 북방 출신이었던 백석에게 해풍을 머금고 자란 란은 무척 이국적인 소녀로 보였다. 시인의 첫사랑이었다.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백석은 그녀가 살았던 통영을 직접 방문했고, 그때마다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 <통영>이란 제목의 시가 세편이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아마 1935년 6월에 쓴 것으로 보이는 첫 번째 <통영>이란 시이다. 시에는 ‘저문 유월의 바닷가’라는 표현이 나온다. 란을 보고 한눈에 반했던 백석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서 같은 달에 혼자 통영을 내려가 본 것 같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을 알려는 욕망이 강해지는 법이니까요, 그렇지만 불행히도 시인은 그녀에게 자신의 뜨거운 속내를 고백하지도 못한다. 사실 란은 친구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지가 서러웠던 걸까. 1936년, 스물다섯 살의 백석은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고보에 영어 선생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날에 대한 사랑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함흥에서 조선권번 출신의 기생 자야를 만난다. 선생들의 회식 자리에서 말이다. 궁중무용을 포함한 가무에 능했던 당시 스물한 살의 자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 백석은 그녀와 3년이나 동거를 하게 된다. 자야는 본명이 김영한으로 나중에 길상화라는 법명을 가지게 된다. 1996년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던 대원각이란 요정을 길상사로 바꾸어 법정스님에게 기증한 것으로도 유명하고 인구에 회자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여성 란과는 달리 자야는 모든 것을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여성이었다. 당연히 백석은 자야의 가슴에 묻혀 첫사랑의 상처도 치유했을 거다. 그렇지만 함흥에서 시작된 자야와의 동거는 계속 불안하기만 했다. 동거 기간 중 부모의 강권으로 두 번이나 결혼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백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을 버리고, 다시 자야의 품에 안긴다. 그렇지만 어디 이것이 이런 식으로 정리 될 수 있는 상황인가. 마침내 백석은 1939년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백석의 장래를 걱정했던 자야로서는 그의 의견을 따를 수 없었다. 그해 늦가을, 싸늘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백석이 만주로 가는 기차에 홀로 몸을 실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누이처럼 그의 모든 것을 품어주었던 자야는 백석에게 ‘나타샤’라고 불리는 여성으로 응결된다. 1938년 3월, <여성>이라는 잡지에 실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바로 이렇게 탄생한 시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스물일곱 젊은 시인이 겪고 있는 사랑의 열병이 차가운 눈발과 대조되어 낙인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는 애절한 시이다.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들을 눈으로 덮어버리고 나타샤와 함께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 마가리(오막살이)’ 에 살고 싶었던 청년의 바람에 마음이 아리기만 하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백석이 감각에 얼마나 민감했던 시인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푹푹’과 ‘응앙응앙’이란 의성어이다. ‘푹푹’은 눈이 내리는 소리인 동시에 성교를 연상시키는 의성어이고, ‘응앙응앙’ 도 하얀 눈을 만지듯이 나타샤를 애무하는 백석의 손길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의성이니까. 감각의 풍성함! 백석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란 오감으로 세계를 느끼고 살았던 거다. 컬러 텔레비전을 보고 MP3를 들으며 자란 우리 현대 시인들이 시각이나 청각이란 협소한 감각에 매몰되어 있을 때, 백석은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감각들로 세계를 살아냈던 거다. 백석이 우리 시인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노스탤지어로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성복 시인이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산문집에서, 백석 시인은 우리와는 다른 아가미로 호흡하고 있었다고 말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체감의 감각적 통합이 여러 감각을 술어적으로 통합하는 것임에 반해, 주어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 시각적 통합이라 할 수 있다. 미지의 사물에 대해 ‘술어적 통합’이 먼저이고, 이어서 그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시각이나 청각의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순간, ‘주어적 통합’이 출연한다.
백석의 시는 주어적 통합‘이 아니라, ’술어적 통합‘의 세계, 즉 생생한 감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백석의 시는 시각적일 뿐만 아니라 청각적이고, 후각적이고, 미각적이고, 촉각적일 수 있는 것이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 아가씨와 사랑을 나누던 장면을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비‘라는 멋진 표현으로 이야기한다. 아마 그녀의 몸에서 김 냄새 비슷한 향이 풍겼나 보다.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 이런 마루방의 불편함은 사실 란을 품지 못하고 애꿏게도 다른 통영 아가씨와 사랑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드는 당혹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강신주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 209~225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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