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절망/김수영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4. 3. 18. 23:50

절망(絶望)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거대한 뿌리」(1974)

■ 핵심 정리

주제 : 절망과 패배 의식에 대한 비판

특징 : ① 유사한 통사 구조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시적 의미를 강화하고 있다.

②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절망적 인식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 시상의 전개 과정

1-5행: 반성하지 않는 사물들

6-8행: 반성하지 않는 절망(절망적 태도에 대한 반성 촉구)



■ 시의 흐름 읽기

[1-5행]

이 시의 화자는 동일한 통사 구조를 반복하여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려 한다. 화자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풍경은 (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모습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곰팡'이나 '여름', '속도'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러한 모습이 반성하지 않는 '졸렬'과 '수치'의 모습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반성할 수 있는 의식을 지닌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에 설사 반성해야 할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다손 치더라도 당연히 반성할 까닭은 없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앞의 사물과 달리 '졸렬'과 '수치'는 인간의 태도나 심리에 관한 것이므로 누군가 이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당연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것들처럼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졸렬'과 '수치'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에도 반성하지 않는 누군가를 고발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6-8행]

화자가 불어오기를 바라는 바람은 와야할 곳에서, 혹은 오기를 기대했던 곳에서 오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오고 있고(공간의 전도), 기다리는 구원은 정작 필요할 때는 오지 않고 예기치 않았던 순간에나 오고 있고(시간의 전도), 반대로 어느 시간에도, 어느 공간에도 없어야 할 절망은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 가득 차 있고)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할 줄은 모른다. 철저하게 반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성하지 않고 있는 절망, 즉 절망적 인식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동시대인들의 패배주의적 태도에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다.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풍경, 곰팡, 여름, 속도, 졸렬, 수치, 절망 등 반성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가 아닌 사물과 관념을 등장시켜 반성하지 않는 존재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주체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물이나 관념과 같이 주체적이지 못하고 사물화되어 있는 인간의 태도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사물과 같이 습관화된 인간의 태도, 즉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주체적이지 못한 의식에 충격을 주기 위한 것으로, 4·19 혁명이 실패하면서 자유 민주주의의 실현에 대한 절망적 분위기가 지배하던 시기에 절망에 빠져 그 수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당시 민중의 패배 의식을 비판하고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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