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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눈주름악보, 낙원동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22. 7. 8. 18:39

 

1 낙원동/ 공광규

 

평생 낙원에 도착할 가망 없는 인생들이
포장마차에서 술병을 굴린다

 
검은 저녁 포장도로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붉은 비닐포장 꽃에서
잉잉거리며 일벌 인생을 수정하고 있다

 
꽃 한번 피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열매도 보람도 없이 저물어가는 간이의자 인생을
술병을 바퀴 삼아 굴리는 사이
포장마차는 달을 바퀴 삼아 은하수 이쪽까지 굴러와 있다

 
소주를 주유하고
안주접시를 바퀴로 갈아 끼우고
술국에 수저를 넣어 함께 노를 젓고
젓가락을 돛대로 세워 핏대를 올려도 제자리인 인생

 
포장마차가 불을 끄자
죽은 꽃에서 비틀비틀 접힌 
몸을 펴고 나온 일벌들이
술에 젖은 몸을 다시 접어 택시에 담는다

 

2 나쁜 놈/ 공광규

 

가슴에 소설책 열권도 더 들어 있다며
가슴을 치던 여인은
한권 소설도 쓰지 못한 채 흙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의 무덤 앞에
'여기, 가슴에 소설 열권을 묻은 채 돌아간 여인이 있다'라는
비석을 세우려다 말았다

 
강아지풀들은 묘 마당에 몰려와
비석을 세우지 않은 내가 못마땅한지
꼬리에 비와 바람과 햇살을 찍어 소설을 풀어 쓰고 있다

 
강아지와 살다가 고독사한 독거노인
가슴비석에 '나쁜 놈'이라는 명문을 파놓고 돌아간 여인에게
묘 앞에서 한없이 미안하다

 

3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려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춸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 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ㅡ시집『담장을 허물다』(창비, 2013)

4 눈 주름 악보/공광규

 

이른 봄날 오후

벚나무 꽃그늘 돗자리 위에서

*모로 누워 자는 아내의 눈주름을 본다

햇볕도 그늘을 만들고

꽃나무도 그늘을 거느리는 걸 보면

*아내에게도 그늘이 많았을 것이다

꽃나무 가지에 앉았던 바람이 깃을 치자

눈주름 위에 음표로 내려앉는(안는)

꽃잎 몇 장

저녁이 와서

*노을 한 폭 개어다 덮어주는데

*낡은 몸에서 오래된 풍금 소리가 터져나온다

 

 

5 이팝나무 꽃밥/ 공광규

​*​청계천이 밤새 별 이는 소리를 내더니
*이팝나무 가지에 흰쌀 한 가마쯤 안쳐놓았어요

*아침 햇살부터 저녁 햇살까지 며칠을 맛있게 끓여놓았으니
새와 별과 구름과 밥상에 둘러앉아
이팝나무 꽃밥을 나누어 먹으며 *밥정이 들고 싶은 분

*오월 이팝나무 꽃그늘 공양간으로 오세요
*저 수북한 꽃밥을 혼자 먹을 수는 없지요
*연락처는 이팔팔에 이팔이팔

공광규, 『담장을 허물다』(창비,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