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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처럼 빛나던 나무와 여인/박수근 화백 추모ㅡ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산문집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22. 1. 1. 18:31

보석처럼 빛나던 나무와 여인/박수근 화백 추모

박수근의 유작전 소식을 신문 문화면에서 읽고 마음먹고 찾아가 (나무와 여인)이라는 작은 소품에 매료되어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고, 그 때의 감동이랄까,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충격을 참아내기 어려워 놓여나기 위해 쓴 게 내 처녀작 (나목)이다. 그는 왜 꽃거나 잎 무성한 나무를 그리지 모싸고 한결같이 잎 떨군 나목만 그렸을까. 왜 나무 곁을 지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뭔가를 이고 있지 않으면 아이라도 업고 있는 걸까. 남자들은 일자리가 없고, 그 대신 여인들이 두 배로 고달팠던, 그러나 강한 여인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고 전후의 빈궁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사는 모습이 그의 선한 눈엔 가장 아름다워 보였을 것 같다. 그래서 오래오래 남기고자
화폭을 돌 삼아 돌을 쪼듯이 힘과 정성을 다해 그린 게 아니었을까. 여인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길목마다
나목이 서 있다. 조금만 더 견디렴. 곧 봄이 오리니 하는 위로처럼. 그와 내가 한 직장에서 보낸 그해 겨울, 같이 퇴근하던 폐허의 서울에도 나목이 된 가로수는 서 있었다. 내 황폐한 마음엔 마냥 춥고 살벌하게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엔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 쉬듯이 정겹게 비쳐졌을까./265~2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