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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손자 볼 나이ㅡ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박완서 산문집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22. 1. 1. 18:16

증손자 볼 나이ㅡ

동무들 중에 자기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아이를 보면 ''쟤 엄마는 의붓엄마인가 봐'' 하고 동정할 정도였다. 엄마는 부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내 시름에 겨워 엄마, 엄마를 연거푸 부르면 끝도 없이 옛날 생각이 나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부르면서
마음이 훈훈하게 젖어오면 오그렸던 몸이 퍼진다. 이 몸이 얼마나 사랑받은 몸인데, 넘치게 사랑받은 기억은 아직도 나에겐 젖줄이다./194쪽
~

우리 엄마도 뒤주에 쌀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반평생을 보냈고 자식들이 밥 먹고 살만해진 후에도
자식들에 대한 안부는 밥으로시작해서 밥으로 끝났다. ''밥은 잘 먹는 게야?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감기가 들었다고? 억지로라도 밥을 챙겨 먹어야 한다. 예로부터 감기는 밥상 밑으로 도망친다고 했어. 애들 도시락 다섯이나 싸주기 얼마나 힘드냐. 그래도 빵 같은 거 사 먹게 하지 마라. 밥이 보약이다.'' 뭐니뭐니해도우리 엄마의 밥 타령의 압권은 내 신랑감을 처음 보고 하신 말씀, ''제 식구 밥은 안 굶기게 생겼더라''가 아닐까,
~
옛날 엄마들에게 밥은 곧 생명이요 사랑이었다. 그래서 독점하는 갓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었다. 엄마가 됨으로서 남의 자식도 다시 보게 되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겨나고 십시일반의 정신도 우러났을 것이다. 십시일반
으로 버텨온 지난 시대를 생각하면 가난까지도 그립다. 실종된 신경숙의 엄마를 줄곧 우리 엄마하고 동일시하고 읽다가 그 엄마가 이 세상 어디선가 마지막 정신을 놓기 전에 남긴 독백,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리네. (생략)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중략) 엄마는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에 이르러 마침내 우리 엄마가 아닌 나하고 하나가 된다. 나야말로 엄마의 도움 없이는 죽지도 못할 것 같은 나약하고 의존적인 인간이니까.
/195~1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