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1.11.19 21:49
수정 2021.11.19 21:54
늦가을 황량한 산비탈을 신령스럽게 밝히는 나무가 있습니다. 겨울로 갈수록 수피가 하얗다 못해 은빛을 발하는 나무. 추위 속에서 더욱 맑아지는 인내와 침묵의 나무, 자작나무입니다.
잎 다 떨군 자작나무들이 잘 발라낸 생선 뼈처럼 새하얀 줄기를 드러냈습니다. 산등성이를 온통 하얀 펜으로 그어댄 듯합니다. 숲은 잿빛으로 더욱 어두워질 테지만, 자작나무들만은 숲의 정령처럼 순백으로 서서 겨울 생명들을 지키겠지요.
그런가 하면 가을 잎 다 스러지고서야 발그레하게 물드는 숲이 있습니다. 푸른 침엽수이면서도 단풍 들고 잎 지는 메타세쿼이아입니다. 연둣빛 새잎이 아기 손처럼 내미는 봄, 진초록으로 우거진 여름, 눈 내린 겨울까지 철 따라 그림을 펼쳐놓지요. 그중에 으뜸이 바로, 시린 바람에 홍싯빛 잎을 우수수 날리며 스산한 시절을 위로하는 11월 끝자락입니다.
서울에도 이미 첫눈이 흩뿌렸습니다만, 첫눈 온다는 절기 소설(小雪)에 전국에 비와 눈 내리면 영하의 추위가 닥쳐온다고 합니다. 흐지부지 왔던 가을도 허망하게 물러가고, 사람들이 무언가에 쫓기듯 앞만 보고 종종걸음 치는 초겨울이 오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황망한 계절이면 내 곁의 이웃부터 살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제 채 동이 트지 않은 새벽, 강릉 어느 파출소 CCTV에 누군가 음료수 상자와 검정 비닐봉지를 놓고 가는 사람이 찍혔습니다. 봉지에는 현금 2백 5만 원과 함께 이런 손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이분은 작년 말에도 이름을 감추고 기부금을 두고 갔다고 합니다. 그 마음에서 시인의 기도를 떠올립니다.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가을 감을 거두고 나서도 여기저기 마을과 절의 감나무들엔 한두 개씩 감이 매달려 있곤 합니다. 굶주린 겨울 새들 먹으라고 남겨둔 까치밥입니다.
서릿바람 불고 눈발 날려도 가지 끝에 빨갛게 남은 홍시를 보며 시인은 빈자일등을 떠올렸습니다. 가난한 여인이 마지막 지닌 동전 한 닢으로 마련해 부처께 바쳤다는 등불이지요.
모든 등이 다 꺼져도 여인의 등만은 오래도록 남아 무명(無明)세계의 어둠을 밝혔다고 합니다. 겨울 숲의 하얀 자작나무처럼.
11월 19일 앵커의 시선은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였습니다.
(관련 시)
*기도/나태주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학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때때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홍시’/윤효(尹曉) *
‘감나무 가지 끝에
홍시 하나가
까치밥으로 남아 있었다
서릿바람 불고
눈발 날려도
가지 끝에
빨갛게
남아 있었다
밤새 꺼지지 않던
빈자일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