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5 시 숲
1, 오늘 강의 소재
박제영 시집 1, '21년 9월 안녕, 오타뱅가*미국 인종차별의 역사2-오타 뱅가(Ota Benga), 오랑우탄과 함께 동물원에 전시된 사나이,*' 2, '17년 그날 저녁 3, '13년 식구 에서 발췌한 시 중심
2, 박제영 시인
출생1966년
소속전강원도개발공사대외협력팀 팀장
학력고려대학교 기계공학 학사
현, 소규모 출판사 운영 중
3, 오늘의 시
3~1 그래도 사랑, 그래서 사랑
너 없으면 못 산다더니
다른 짝 만나서
아들딸 놓고 잘 사네
알콩달콩 잘도 사네
조금만 더 살아보시게
너 없으면 못 산다더니
몇 년 같이 살아보니
너 때문에 못 살겠다네
너 죽고 나 죽자 하네
조금만 더 살아보시게
좋아서 죽고 미워서 살고
죽자니 살고 살자니 죽고
에헤라, 그래도 사랑이라네
오호라, 그래서 사랑이라네
3~2 거룩한 계보
식구들 먹다 남은 밥이며 반찬이 아내의 끼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타박도 해보지만 별무소용이다
버리고 하나 사라 얼마 된다고 빤스까지 꿰매 입나 핀잔을 줘도 배시시 웃는데야 더 뭐라 할 수도 없다
지지리 궁상이다 어쩌랴 엄마의 지지리 궁상이 아버지 박봉을 불리고 자식 셋을 키워낸 것이니 어쩌랴 아내의 지지리 궁상이 내 박봉을 불리고 자식들을 키울 것이니
그래서다 고백컨데
우리 집 가계家系는 대를 이은 저 지지리 궁상이 지켜낸 것이다
3~3 시 좀 봐달랬더니
여섯 번째 시집을 준비하면서 교정 좀 봐달라고 했더니 며칠 후 반으로 접은 쪽지를 쥐여주는 거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보란다
당신 시 읽는 게 무척 힘이 드네
그 사이 많이 시들고, 궁상도 많이 늘었네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줄 왜 몰랐을까
교정보다 위로가 필요한 내 남편
당신 덕분에 우리 식구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까 자책하지 말고 힘내요
시 좀 봐달랬더니 엉뚱한 것만 보고 있는
참말로 얄궂은 당신
당신 때문에 시도 못 쓰겠다
3~4 영찬이와 영심이는 누구를 닮았나
- 에라 만득아, 에라 구신아
영찬이 그눔아 고시 포기하고 취직한단 게 기껏 복덕방이 뭐래? 그게 언젯적 일인데
왜 또 그놈의 복덕방 타령이래유 글구 복덕방이 아니라 부동산 컨설팅 회사라잖아유
그게 복덕방인겨 법대 나와서 복덕방이 뭐여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는 법인디 고작 5년 만에 포기하는 그기 사내새끼가 할 일이냐 이 말이여 누굴 닮아 그러나 몰러
이 양반이 애먼 사람을 왜 또 긁는대유
영심이 그년도 똑같애. 남들 다 부러워하는 이대 대학원까지 나왔으면서 맨날 빈둥거리는 꼴 좀 봐 애들이 다 누굴 닮았나 몰러
시방 그게 말이유 가마니유 영찬이 영심이가 가씨유 마씨유 누구 씨유 글구 영심이가 뭘 빈둥거려유 공무원 준비한다고 그러는 거잖아유
그러니까 하는 말이여 이대 나온 애가 7급도 아니고 9급이 뭐여 그럴 거면 대학원은 왜 댕겼대
그런 당신은 택시 몰 거면 대학은 왜 댕겼대유 그리 잘났으면서 회사는 왜 짤렸대유
에라 만득아 에라 구신아 또 다시 가리봉동 전쟁이 벌어진 것인데 영찬이는 누구를 닮았나 영심이는 누구를 닮았나 만덕 씨와 귀순 씨 둘이 낳아놓고는 서로 모른다 하네
3~5 우연
다음부터는 과속하지 마시고 안전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네 네 열심히 단속 잘 하세요 암요
죽기살기로 과속하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던 사내는 갓길에 앉아 담배 한대를 문다 꽃은 어디 갔을까 대궁만 남은 민들레를 보다가 낮게 엎드린 대궁을 흔들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풀 아래 뿌리쯤에서 이 순간 벌어지고 있을 우주운행에 관한 비밀들, 벌을 잡아먹다 말고 도망치고 있는
스라소니거미와 제 몸을 말고있는 쥐며느리의 긴장에 대해서, 다음달 과태료를 내면 그뿐일 이 우연한 사건에 대해서
3~6 식구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디순한 양이 되었다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 버린 화초도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결은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
3~7 시답잖은 시론
시는 시(詩)다 말로 절을 짓는 거다 잘못 지으면 땡중 된다 이 말이렸다
시는 시(侍)다 사람이 절이고 사람이 부처다 그러니 모셔라 이 말이렸다
시는 시(市)다 구중궁궐이 아니라 책상머리가 아니라 시는 저잣거리에 있다 이 말이렸다
시는 시(視)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라는 거다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잠수함의 토끼처럼 세상이 무너지고 가라앉고 있는 것을 먼저 보고 짖어라 이 말이렸다
시는 시(矢)다 짖어도 안 되면 아예 쏴라 세상 무너뜨리고 망가뜨리는 놈들 가슴팍에 화살을 팍팍 꽂아라 이 말이렸다
이상의 것을 무시하면 어떻게 된다고?
시가 시(屎) 된다 된똥도 아닌 묽은똥 된다 이 말이렸다
아예 시(尸)가 되는 수도 있다 시쳇말로 죽은 시가 된다 이 말이렸다
3~8 근황
잘 살고 있는 거냐고, 물으셨지요?
죽네사네 하면서 죽진 못하고 삽니다 죽어라죽어라 삽니다 이 달에도 쥐꼬리 월급 받았지만 이것저것 빼고 나니 빚만 50만원입디다
시를 더 이상 쓰지 않을 거냐고, 물으셨지요? 먹고사는 일이, 직원들 월급 주는 일이, 시보다 급한 일이라 말하면 변명이겠지만, 그래도 그리 말하면 속이 좀 편해집디다 실은, 세상의 빛이 되는 시를 쓰겠다고 삼십 년 매달렸는데 결국 세상에 *빚만 질 뿐입디다 빚쟁이들이 *나를 조질 때마다 *나는 술을 조집니다 내가 술을 먹다가 술이 술을 먹다가 마침내 술이 나를 먹어치울 때까지 술을 조집니다 술이 쓰다가 달다가 마침내는 아무 맛도 없습니다 사람이 많이 차갑습니다
내내 여일하시길
3~9옛날 비디오를 보면서
춤을 추는 다섯 살짜리 도희를 보면서 스물다섯 살 도희와 스무 살 도은이가 쟤 누구야 쟤 너무 귀여워 까르륵 까르륵
울며 떼쓰는 세 살짜리 도은이를 보면서 스무 살 도은이와 스물다섯 살 도희가 쟤 누구야 쟤 너무 이뻐 까르륵 까르륵
옛날의 자기를 보면서 자기가 아니라며 두 딸의 숨이 넘어가는 것인데
그 사이 슬며시 끼어들어서 옛날 어린 아내와 옛날 어린 남편을 보다가
저게 당신이야 저게 당신이었어
까르륵 까르륵
아내와 나도 그만 아이들처럼 숨이 넘어가는 것인데 곰곰 생각해보니 *함께 산다는 게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어* *어제의 당신을 보내고 오늘의 당신을 맞이하는 일* 다시 이십 년 쯤 지나 옛날 비디오로 오늘을 보면 그럴 테지 저이는 누구야 까르륵 저이가 당신이었어 까르륵 *어제의 나와 당신을 지우고 내일의 나와 당신을 기다리면서 매일 새로운 오늘을 살다가 그렇게 한 생이 지나는 거였어
* *자발적 돌발 시제/길들이다*
옛날 비디오를 보면서/박제영의 시를 공부할 때 쯤 괜히 자발적 번개시제 할 때 쯤 이라 생각하며 양학산이 그려진다
그사이 강의에 길들여져 있다
컨디션 좋은날 당연한 새끼줄은 양학산이다
용흥동 짓다만 괴물 아파트 재건축장 지나 제법 얌전한 오르막을 통해 가쁜 숨을 벤치에 잠시 내리고 아침약 모이 먹듯 먹고 폰 검색하고 연화재 주차장 맞은편 공동묘지 뒤로 올라 좌회전 하여 첫번째 운동시설장에서 운동하고 간식 먹고 폰으로 신문 보고 공동묘지 앞으로 하산이 정해진 코스다. 나중에 가야할 산 어떤 이는 고봉밥을 안고 어떤 이는 책받침같은 얇은 비석을 안고 누워 있다
나도 그래야지
그저 간단히 내 표시만 있어도 족하리.
양학산이 별 쓸데 없는 생각 다 한다고.
아직 한참 남았으니 조심히 어서 내려 가란다.
오늘도 먼 훗날 내 집터를 미리 보고 산을 내려간다
3~10 그런 저녁
바람이 지나간 후에도 *시누대가 저리 흔들립니다 새가 날아간 후에도 댓잎이 *저리 흐느낍니다
*내 생애 전부를 흔든 사람
*내 생애 전부를 울린 사람
*대숲 사이로 옛사랑이, 옛 문장이 스미어
*붉은 노을로 번지는 그런 저녁이 있습니다 모처럼의 산책이라 시 한 수 읊은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구냐고 도대체 옛사랑이 누구냐고
*그 사람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옛사랑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노을 사이로 당신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지는 *붉어도 좋은 그런 저녁이 있습니다
3~11 어미
부제/ 지구에는 1400만 종의 생물이 산다고 알려져 있지만 나는 어미라는 족속보다 더한 별종을 알지 못한다ㅡ에밀 조르에서
한때는 여자였고 한때는 사람이었으나
*모두 아궁이에 던져버리고 스스로 불이 되었으니 *어미는 얼마나 뜨거운 족속인가
젖을 달라면 젖을 주마
*뼈와 살을 달라면 뼈와 살을 내어주마
내 너를 잃으면 창자를 끊으리라
어미는 얼마나 독한 족속인가
*어미를 지펴서 어미를 태워서 한 식구의 구들장이 절절 끓는 것이다
*한 식구의 캄캄했던 밤이 환한 것이다
독한 년! 모진 년!
세상의 욕은 어미가 모두 거둘 것이니
너는 살아야 한다 어미를 딛고 살아남아야 한다
*불에 덴다한들 어떠랴
*독이 오른들 어떠랴
지구에는 6000 종의 언어가 있다고 하지만 어미, *그 보다 더 간절한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3~12 사는 게 다 그런 거더라
지난봄에 작은 텃밭 하나를 무상으로 임대받아
평상도 하나 만들고
밭에는 이것저것 씨를 뿌렸더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안했나
뿌린 대로 거둔다 안했나
옥수수도 자라고 감자도 자라고 열무도 자랐는데
자라긴 자랐는데 이거야 원
씨를 뿌리지도 않은 온갖 잡초들 옥수수보다 더 크게 자랐더라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온갖 들꽃들 다투어 피었더라
이게 옥수수밭인지 감자밭인지 열무밭인지
이를 어쩌나 싶은데
속 모르는 당신은 꽃 피었다고
꽃밭이 되어버린 텃밭을 저리 예뻐라 좋아라 하더라
에라,오늘 하루 소풍 나온 셈 치자고
막걸리 한 사발 걸치고
평상에 벌러덩 누워버렸더라
노고지리 우지진들 어떠랴
사래 긴 밭 나중에 갈면 또 어떠랴
에라,모르겠다
한숨 푹 자고 보자고
사는 게 다 그런 거더라
3~13 끝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그 길을
위험한 여행 함께할 사람 구함. 봉급 적음. 혹독한 추위, 길고 캄캄한 어둠, 끊임없는 위험을 감수해야 함. 무사 귀환 보장하지 못함. 단 성공하면 명예가 따를 수 있음.
1914년 3월 섀클턴(Ernest Shackleton)이 런던타임스에 올린 구인 광고다 믿기 어렵겠지만 무려 오천여 명이 지원했고, 선발된 스물일곱 명의 대원들과 함께 섀클턴은 그해 8월 자신의 세 번째 남극 횡단 도전에 나섰다
남극을 향해 출항한 인듀어런스 호는 6개월 후 침몰했다 광고에서 말한 것보다 더 극한 상황에 빠졌을 때, 그들이 살아 돌아올 것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634일 만에 남극의 얼음 바다를 탈출한 그들은 모두 무사 귀환했다 남극 횡단 도전은 실패했지만, 그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의 극점을 밟으려 도전하는 이들이 있다 무수히 실패했지만, 시의 얼음 바다에 침몰하고 또 침몰하면서,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
*모든 시는 그러니까 실패의 기록이다
3~14 월하정인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달빛이 참 곱다
*근데 그거 알아요?
*사람만이 계절의 변화를 모르는 거
*세상천지 사람만이 철부지라는 거
*달빛이 고운들 당신보다 고울까?
*당신과 함께라면 철부지로 몇 생이 저문들 서럽지 않겠다
백 년이 일각 같은 생이겠다
*달빛 아래 당신과 나의 손금을 포개어
*당신의 전생과 나의 후생을 아득히 짚어보는 것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알지 않겠나
3~15 어떤 독해
인공호흡기에 기도를 내어준 장인은
가늘디가는 손가락으로
흐릿흐릿 허공에 글씨를 썼다
너무 흐려서 읽기가 어려웠다
아버님 다시 써보세요
ㅇ,,,ㅂ,,,ㅁ,,,ㅇ,,,ㅈ,,,
*허공의 문장은 쉽게 번졌다
몇 번을 쓰고 몇 번을 지운 끝에
*실핏줄 같은 문장을 겨우 읽어드린다
여보,,, 미안해,,, 그만,,,집에,,,가서,,,쉬어,,,
아닌 척 태연한 척 하시지만
*어쪄랴 장모 눈시울 이미 붉다
3~16 아내
다림질 하던 아내가 이야기 하나 해주겠단다.
부부가 있었어요.
아내가 사고로 눈이 멀었는데, 남편이 그러더래요.
언제까지 내가 당신을 돌봐줄 수는 없을 테니까
이제 당신 혼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아내는 섭섭하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혼자 시장도 가고 버스도 타고
제법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마침 청취자 사연을 읽어주는 라디오 방송이 나오더래요.
남편의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아내가 혼잣말로 그랬대요.
저 여자 참 부럽다.
그랬더니 버스 기사가 그러는 거예요.
아주머니도 참 뭐가 부러워요.
아주머니 남편이 더 대단하지.
하루도 안거르고 아주머니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구만.
아내의 뒷자리에 글쎄 남편이 앉아 있었던 거지요.
기운내요
여보.
이럴 때 오히려 당당하게 보여야 해요.
*실업자 남편의 어깨를 빳빳이 다려주는 아내가 있다.
영하의 겨울 아침이 따뜻하다.
**기타 시
*혼자만 착하믄 뭐하노 / 박제영
착하다 사람 좋다
그기 다 욕인기라
사람 알로 보고 하는 말인 기라
겉으로는 사람 좋다 착하다 하믄서
속으로는 저 축구(芻狗) 저 등신 그러는 거다
우리 강생이 등신이 뭔 줄 아나
제사 때 쓰고 버리는 짚강생이가 바로 등신인 기라
사람 축에도 못 끼고 귀신 축에도 못 끼는
니 할배가 그런 등신이었니라
천하제일로 착한 등신이었니라
세상에 두억시니가 천지삐까린데
지 혼자 착하믄 뭐하노
니는 그리 물러 터지면 안 되니라
사람 구실을 하려믄 자고로 모질고 독해야 하니라
길게 말할 게 뭐 있노
우리 강생이 그저 할배랑 반대로만 살면 되니라
하모 그라믄 되니라!
**박제영 시집/식구 게재 시
*엄마
묵은지가 그냥 되능 줄 아나
배추가 다섯 번 죽고나야 되능겨 ?
뼈는 와 묵다말고 버리노
심줄까정 파먹어야 제 맛잉겨 ?
묵은지보다 더 늙은 우리 엄마
여자를 몇 번이나 죽여서 엄마가 되었을랑가 ?
뼈라는 뼈 죄다 비어버린 우리 엄마
얼마나 더 파먹어야 나의 허기가 채워질랑가 ?
저, 저, 말 받는 뽄새 좀 보소.
우리 아들 언제나 철이 들꼬
뼛속 심줄까지 파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
마침내 다 먹어치워도 그 맛과 향을 잊지 못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음식을 우리는 엄마라고 부르지
맘마 먹자.
아가 엄마 먹자.
못/ 박제영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던, 삼촌은 죽어서 못이 되었네
엄마야 누나야 가슴 속에서, 밤마다 출렁이는 시퍼런 못
녹이 슬고 있는 두 여자가 있었네
엄마야 이제 그 못 뽑자 제발"
엄마는 이십 년을 보챘지만 외할머니는 죽을 때까지 심장에 못을 키웠네
못 된 것 못 된 것"
외할머니 울음을 삼킬 때마다 못은 조금씩 깊어졌네
눈물샘이 다 마를 때까지 깊어진 못이 마침내 외할머니를 삼켰네
외할머니 봉분 올린 그 밤 엄마는 외할머니가 막내 삼촌 젖을 물리고 있는 꿈을 꾸었네
엄마가 이제야 못을 뽑았구나"
엄마가 환하게 울고 있었네
*화투和鬪/ 박제영
점에 백 원짜리 밤새 쳐봐야 따도 일이만 원이요 잃어도 일이만 원이지만 화투판이란 게 본디 걸린 판돈이 십 원이든 백 원이든 감정조절이 그리 녹록한 게 아니어서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기 마련이라 어젯밤도 그랬다 “아빠 빨리 죽어”, 그러니까 여동생이 자기 패가 좋으니까 아빠는 광이나 팔고 한 판 쉬시라고 한 것인데, 아버지 갑자기 화투판을 엎으며 “죽으라니, 그게 어디 애비한테 할 소리냐, 못된 년 같으니라고”, 두어 시간 내내 선 한 번 못 잡고 잃기만 했으니 속이 상하셨던 탓일텐데, 마흔 살 넘은 딸도 울고 일흔 살 넘은 아버지도 울고 그렇게 판이 깨졌던 것인데, 오늘 아침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버지 어머니 나 그리고 여동생 다시 판을 깔고 앉았더니 “어제 그리 난리치고도 또 화투냐” 형이 한 마디 던지는 것인데, 아침상 준비하던 두 며느리 그만 웃음보 터뜨리니 둥근 웃음이 방안 가득 번지더라
*벌초
숲은 우거지고, 산은 깊을 대로 깊어져
이 골이 저 골 같고 저 골이 이 골 같은데
도무지 길 없는 길을
낫 하나로 어찌 저리 쉽게 오르시는지
아버지의 낫질 한 번에
어둡던 길이 금세 환하다
덤불은 우거지고 잡풀은 웃자랄 대로 웃자라
비알인지 무덤인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표석도 없고 비석도 없는 봉분을
낫 하나로 이찌 저리 쉽게 찾으시는지
아버지의 낫질 한번에
봉도난발이었던 고조부의 무덤이 금새 환하다
아버진 어찌 그리, 길도 무덤도 잘 찾으요?
ㅡ늙으면 저승길도 저승집도 환해지는 법이다
*시집 두 채
시다 아직 덜 여문 것은 덜 익은 것은 죄다 시다 그러니 시다 詩라고 하는 것들은 대개 시가 아니다
덜 영근 것이다 진짜는 시가 그 안에 든 것이라야 한다 詩든 것 그러니까 시는 시든 것이다 노인정 앞 돌계단에 노파 둘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온전히 시든, 시집 두 채가 나란히 햇볕을 쬐고 있다.
*훌쩍
농담 한 마디에도 서러워, 훌쩍
눈물이 그렁그렁 하던 딸아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더니, 훌쩍
엄마 키를 넘어셨습니다
다 겄나 싶었는데
외할아버지 응급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에
할아버지 돌아가시는 거냐며, 훌쩍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아직은, 아직은 아닌가 봅니다
이슬처럼 여드름 송송 맺힌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춥니다
언젠가는 훌쩍,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우리 곁을 떠날거란다
또 언젠가는 훌쩍, 엄마 아빠도 네 곁을 떠날거란다
어느 것도 서러워하지 말거라
마침내 이별도 훌쩍, 넘어서가라
잠결에, 꿈결에 들었을까요?
저리 환한 미소를 짓습니다
*선인장
아내도 한때
넓은 잎 무성한 활엽식물이었다
물오른 줄기로 잎새마다
형형색색 꽃피었던 활엽식물이었다
고비가 몽골고원에만 있는 사막은 아니어서
아내에게는 남편이 고비고 자식들이 고비여서
더 많은 눈물이 필요했던 아내는
잎을 하나씩 지우며 고비를 넘겼다
여자를 내준 마디마디 가시로 아물며
고비를 넘었다
아니다
여전히 고비를 건너는 중이겠다
*쉰 살, 등신 꽃 / 박제영
그래 졌다, 세상에 지고
그래 졌다, 처자식에 지고
평생을 지고, 지면서도 웃고 있는
바보 같은 꽃
꽃잎이란 꽃잎, 다 지고
꽃대마저 지고 있는데
졌다 내가 졌다, 웃고 있는
지지리도 물러 터진 꽃
어떤 식물도감에도 그 이름 없지만
천지사방 지천으로 지고 있는
졌다 내가 졌다, 웃고 있는
바보 천치 같은 꽃, 꽃
지는 꽃
지고도 웃는, 당신
등신 꽃
*비 내리는 오후 세시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 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는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때는 "나" 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4.오늘의 단상
뱃머리 옆길 텃밭의 배추 포기가 바람에 너풀너풀 추수를 뿌듯히 부른다. 형산강변의 갈대도 제법 누렇고 머리결도 제법 깊이를 더한다. 가을 햇살을 밋있게 들며 오늘 배운 박제영 시를 곰씹어본다 누구나의 일상 속 작가 특유의 원포인트를 부각시켜 해학적으로 쉽게 시로 읊어내기. 웃읍기도하고 지나간 나의 앨범을 뒤적이듯 하여 감화감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