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평보문창
ㅡ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창작
ㅡ뚜렷한 목표 설정
ㅡ에너지 자작 북돋기
ㅡ습작 다작으로 늘 예열
ㅡ퇴고시 뜸 들이기, 자주 보기보단 묵혔다 보기
ㅡ퇴고시 컴 모니터상보단 출력하여 지문으로 보기
ㅡ습작 취지 초심 유지하기
ㅡ글에서 노인냄새 안내기
ㅡ문을 치열하게 두드리기
*등단이란,,,7순때 시집 발간와 시낭송회
*2020년 토지 문학제 시 당선작
**물때/신재희 (본명 신춘희)
느리게 다가오는 물의 걸음
물의 속도가 멈춘 자리 계곡의 바닥이 미끈거린다
거세게 흐르지 못하는 물길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머뭇거렸을까
물의 엉덩이가 닿았던 자리마다 물때가 끼었다
구불구불 휘돌아온 물소리를 먹고 자라는 돌들
줄어든 계곡물에 뒤척일 기력이 없어 안색이 누렇다
길쭉하거나
납작하거나
둥글거나
계곡의 슬하에서 뒹굴며 자란 물의 피붙이들
수면 아래 제 몸피만큼 걸쳐 입은 물때는
정체된 속도에 주저앉은 습생의 뿌리들이다
물의 허리를 잡다 발목이 휘청거린다
물의 지느러미도 낮은 곳을 따라 구부러질 뿐
찌든 물때는 쉬 벗겨지지 않는다
돌멩이 하나 집어
허물조차 껴안고 살던 숨결을 물에 씻는다
말간 얼굴을 드러내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살아난다
계곡의 물소리가 줄어들어도
고요히 파닥거리며, 뒤척이며
물의 때를 기다리는 돌멩이들
물때를 벗은 싱싱한 맥박이 손바닥을 타고 오른다
신재희(본명 신춘희)
경북 포항 출신
2018년「열린시학」신인상
ㅡ깊은 맛이 없다
*얼굴/이병률
하루 한 번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 얼굴 때문입니다
당신 얼굴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갑니다
어머니도 유전적으로 앉아 있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누구나 그렇듯 얼굴만으로는 고아입니다
당신이 본 풍경과 당신이 지나온 일들이 얼굴 위에서 아래로 차곡차곡 빛납니다
눈 밑으로 유년의 빗금들이 차분하게 지나가고
빗금의 각을 타고 표정은 파도처럼 매번 다르게 흐릅니다
얼굴은 거북한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안간힘 정도는 괜찮지만 계산된 얼굴은 안 됩니다
당신 얼굴에 나의 얼굴을 닿게 한 적 있습니다
무표정한 포기도 있는데다 누군가와 축축하게 헤어진 얼굴이어서였습니다
당신 앞에서 이유 없이 웃는 사이
나는 당신 얼굴이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 한 번 당신과 겹쳐지는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ㅡ『애지』(202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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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등.
ㅡ시인 자신의 자화상 뜯어 봄
ㅡ패러디 해 보기
ㅡ시,수필,소설 상호 연관성
*유리창의 세계사/송재학
유리에 처음 금이 갔을 때
창 너머
빈 화단에 꽃을 심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음이 소거된 계단처럼
창 너머 흑백 무늬가
소년이 되고 노인이 됩니다
유리창의 균열이 더 커지면서
손아귀에 우연히 붙잡힌 참새의 심장을 움켜쥔 셈입니다
부서지려는 유리가 지금 산산조각 나는 유리의 소리를 냅니다
파편을 끝까지 붙잡아야 하는
이유 중에 괴로운 얼굴이 있습니다
나도 얼굴 중에 조각난 혀를 붙잡았습니다
언젠가
유리창이 새 것으로 바뀌면서
잘 보이던 것들조차
원경이 되어 나와 무관해집니다
다시 유리에 금이 가면
창 너머 나와 가까워지려는 풍경들이 항상 탄생하는 걸까요
어쩌면 유리 너머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유리 안쪽이 아닐지,
부서진 유리와 부서질 유리만이
유리의 세계라고 믿었습니다이어도 좋을 겁니다
- 계간 《시와 사상》2020년 가을호
송재학
경북 영천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검은색』 『슬프다 풀 끗혜 이슬』외 다수
*비둘기에 대한 예의/김기택
차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비둘기는 비키지 않았다.
뻔히 타이어를 보면서도 날아갈 기미가 없었다.
아주 느리게 다가가면서 위협했지만
먹이를 향한 순도 높은 집념과
수많은 구두들을 다 비켜가게 했던 배짱이
타이어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아침부터 피와 깃털로 타이어를 더럽힐 수 있는지
물컹거리며 짓뭉개지는 느낌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지
할 테면 얼마든지 해보라는 기세였다.
과자 부스러기를 쪼는 부리에 몸통이 단단히 박혀 있어서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질 것 같지 않았다.
급하게 차를 피했다가는
먹이에 붙어있는 부리에서 머리통이 우두둑 뜯겨버릴 것 같았다.
뒤차가 빵빵거렸지만
먹이 쪼는 부리는 바닥에 둔 채
몸통만 다급하게 날아오르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저 몰아일체와 무아지경을 깨트리고
성실한 노숙을 방해할 권리가 나에게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보험을 두둑하게 들어놓고
비둘기 자해공갈단이 어디엔가 숨어서 지켜볼 것 같아서
귀찮은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타이어는 이빨과 발톱을 등과 무릎처럼 둥글게 구부리고 앉아
다른 비둘기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비둘기가 어서 식사를 마쳐주기를 기다렸다.
ㅡ《시인시대》 2020년 가을호
ㅡ과자부스러기를 쪼는 부리에 몸통을 박고~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핥을 때/김기택
입에서 팔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연약한 떨림을 덮는 손이 나온다.
맘껏 뛰노는 벌판을
체온으로 품는 가슴이 나온다.
혀가 목구멍을 찾아내
살아 있다고 우는 울음을 핥는다.
혀가 눈을 찾아내
첫 세상을 보는 호기심을 핥는다.
혀가 다리를 찾아내
땅을 딛고 설 힘을 핥는다.
혀가 심장을 찾아내
뛰고 뒹구는 박동을 핥는다.
혀가 나오느라 꼬리가 길다.
혀가 나오느라 귀가 빳빳하다.
혀가 나오느라 발톱이 날카롭다.
⸺《문장웹진》 2020년 5월호, 월간 《현대시》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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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1957년 경기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소』『껌』『갈라진다 갈라진다』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입술들은 말한다/나희덕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죽음에 대해
오늘 저녁 먹은 음식과
산책길에 만난 노을빛에 대해
기후위기와 정부의 부동산대책에 대해
생일과 장례, 술과 음악, 책과 영화, 개와 고양이에 대해
마을을 휩쓸고 간 장마비에 대해 파도소리에 대해
얼굴도 없이 몸뚱이도 없이
격자무늬 벽에 처박힌 채 입술들은 말한다
거미처럼 분비액을 뽑아내는
저 입술들은 대체 어디서 모여든 것일까
각기 다른 언어로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기 다른 리듬으로
목소리들은 서로 삼키고 뱉고 다시 삼키고 뱉고 삼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소음의 벽을 향해
중얼거린다
들리지 않는 노래를 너무 많이 들었나봐
귀가 먹먹해
먼 들판에 풀벌레소리 자욱해
못이 박힌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나봐
귀는 매일 투명한 피를 흘리고 닦아내고 다시 흘리고
격자무늬 벽 속에서 입술들은 말한다
오늘도 잠 못 드는 이유에 대해
왜 자신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지에 대해
복용해온 약에 대해
또는 피 흘리는 말, 다른 입술들에 대해
ㅡ『시와 반시』(2020, 가을호)
ㅡ나희덕/고아원원장딸로 고아아닌고아로 모정을그리워함
**그릇/안도현
1
사기그릇 같은데 백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담아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하지만 벌써 버릴 수 없는/장옥관
섭씨 38도를 오르내리던
오후의 골목길
밀차에 기대어 걷다가 서고 걷다가 쉬며
다가온 주름살투성이 할머니
가쁜 숨 몰아쉬며
날 보고
짜장면 파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하지만 벌써 버릴 수 없는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남아 있는
기적 같은 날들이다
계간 《문학동네》 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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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관 /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황금 연못』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등.
**결/송용탁(제3회 남구만 신인문학상 당선작)
빈 도시락 통이 다리를 퉁퉁 칠 때면 무릎 근처에서 달그락 물결이 일었다. 학교 마른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길은 흐르고 나는 고인다. 이름 모를 꽃들이 내 이야기를 엿듣곤 했다.
결이란 말은 혼자서도 혼자가 아닌 마음
늘 골목 끝에 서 있던 엄마가 없다. 세상의 숨결이 겉잎을 버리는 시간. 혼자라는 속잎이 있다. 시시한 놀이가 거친 숨결을 달랜다. 견뎌야 하는 목록이 늘어날수록 숨은 여러 결로 쌓였고 숨을 내쉬기 힘든 무게가 있었다.
소실된 곳에 가면 세상은
나를 설득하고 싶은 모양이다
떠난 마음들이 사는 도래지가 있다고,
노을의 손을 잡고 뛰었다. 엄마의 살에서도 물결이 인다. 살의 결이 말을 걸어 올 때 길은 생이 아닌 다른 힘으로 걷게 된다. 엄마와 살이 닿으면 다 말하지 않아도 엄마는 알았다. 나는 혼자가 아닌 것 같아 응결된 마음이 눈물처럼 흘렀다. 세상의 길이 붉게
**스테이플러/최금진
루이15세는 왕가의 문장을 박아 넣기 위해 스테이플러를 생각했다
단호하게 제 할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스테이플러의 완고함은
노쇠한 자의 빛나는 틀니 같은 것이었다
때로 스테이플러는 환자의 벌어진 살집을 꿰매는 도구였다
살점 속에 흰 뼈가 비치는 살과 살을 엮어 봉합하면
혈관에서 뇌까지 뚫려 있는 상처의 흔적도 보수해 줄 것만 같았다
원고를 보내기 위해 복사된 종이들을 스테이플러로 찍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함구령을 내리듯 변명의 여지가 없는 문장들이
나를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봉투에 종이뭉치를 넣고
다시 한 번 더 철심을 박아 쿵쿵 밀봉을 하고 나면
시간의 한 마디를 꺾어 다음 마디에 이어붙이는 기분이 든다
스테이플러를 열면 수많은 ㄷ자 형태의 문고리들
어떤 문도 쉽게 타인을 통과시키진 않는다고,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살아온 날의 절반을 구부려서라도 전보다 더 단호해져야 한다고
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버릇
그것은 어떤 트로피보다 영광스럽게 나를 붙잡아 놓았다
팔뚝 흉터에 난 스테이플러 자국들을 험상궂게 까 보이면서
한 번 떠난 곳으론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고 나는 다른 안쪽을 닫아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은 무수한 쇠못들 같았다
쿵쿵, 당신을 봉투에 넣고 스테이플러를 찍는다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선 가까운 인근부터 잘 고정시키고 봉해야 한다
그리고 차가운 철심들이 구부러지는 각도처럼
뭔가를 접어야 할 때는 손과 허리를 굽혀 힘을 줘야 한다
스테이플러 안에 가득 쟁여둔 폐쇄의 욕망들이
실은 너무 쉽게 뜯길 것을 두려워하는 연약한 종이의 울음이란 걸 알기에
나는 어디서든 이빨을 앙다물고 웃는다
⸻계간 《시와 반시》 2020년 가을호
최금진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신인상에 시 당선.
시집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
이발사의 세 번째 가위
박지웅
평생 남의 뒤에서 살았다
이발사는 뒤에서 웃는 직업이다
이발소로 흘러든 것이 구름이라도 깍듯이 대접한다
등 굽은 이발사는 낙타 뼈로 깎은 빗과 세 번째 가위를 들고
벽에 길게 덮인 거울로 들어간다
대개 구름은 희미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머리칼을 칠 때마다 약간의 물소리가 빠져나간다
손님과의 대화는 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가위는 은빛 날개를 한 비행기처럼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그때마다 구름은 머리채 부드럽게 흔들며 눈을 가늘게 뜬다
가죽 의자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듯하지만
이발 보자기 걷으면 구름은 어느새 걷히고 없다
뭉클하게 잘려나간 것을 쓸어 모으면
바닥에 낙타처럼 웅크린 것들은 파랗게 눈 뜬다
일찍이 이발사는 부모가 솜구름을 타 이불 속에 숨기는 것을 알았다
어린 그는 자주 울면서 농에 들어갔다
거기에 아이들이 꽃다발처럼 이마를 붙인 채 울고 있었다
뭉게뭉게 어둠과 뭉쳐진 무늬들이 목관에서 흘러나갔다
낙타는 등에 구름을 얹고 산다
베두인들은 비가 꼭 필요해지면 낙타의 혹을 찌른다
구멍에서 흘러나온 검은 구름을 마시는 꿈에서 이발사는
세 번째 전생을 보았다
그 생애에서 그는 나무피리로 흰 낙타를 불러 구름을 꺼냈다
죽은 것의 눈꺼풀 위에 돌을 얹고 한 줄로 된 현악기를 켜며
저 낭떠러지에 떨어진 쓸쓸한 음악을 한 번은 찾으러 가야지 마음먹었다
이발사가 묻힌 창에 몇 개 구름이 돌처럼 얹혀 있다
⸺월간 《현대시》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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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1969년 부산 출생. 2004년 《시와 사상》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너의 반은 꽃이다』『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검은 기린/김륭
“이 육체 속에서 우리는 무얼 한단 말인가.”
내 옆 침대에서 누울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ㅡ안토니오 타부키, 『인도 야상곡』
영혼을 다 써 버린 후 검은 연기처럼, 다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나는, 내 몸이 어떻게 지내는지
당신이 지새는 밤과 어떻게 섞이는지 보려고
내가 없는 내 죽음도 보일지 몰라 하얀 침대시트를 함께
말았던 당신의 죽음 또한
그러나 지금은 자는 게 좋겠다고
선반 위에 올려놓은 130g 햇반처럼 납작해지는
별, 하얀, 검게 그을리기 좋은
문득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 또한 돌아왔다고
나는 다 써버리지 못한 울음으로 가만히
두 눈을 꺼트릴 것이다
없는 아름다움도 막 팔아먹을 만큼 우린 참
식물적으로 아팠지, 이런 문장 하나쯤은 서로의 입에
넣어 줄 수 없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듯
검게 부러져 가는 서로의 목을
베개처럼 껴안고
나는 왜 자꾸 눈사람 머릿속이
검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ㅡ『시인수첩』(202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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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1961년 진주 출생.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원숭이의 원숭이』,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별에 다녀왔습니다』『엄마의 법칙』『첫사랑은 선생님도 일 학년』『사랑이 으르렁』.
**다이 하드/서효인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죽음을 생각한다
이곳에서의 사고사야말로 최대한의 자연사다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미친놈처럼 운전하는
사람이 꼭 있어서 평소에 안 하던 욕을 자연스레 사고처럼
하게 된다 저 새끼가 뒈질라고 환장했나
⸺《문장웹진》 2020년 10월호
내가 죽으면 보험회사 직원이 출동할 거고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덤프트럭 운전자에게도 선량함이 깃들어 있을 테고 중학생 자녀라거나 갚아야 할 대출이라거나 하는 게 있을 테다
내가 죽으면 아내는 보험회사에 서류를 제출해야 할 것이며 운전을 더욱 무서워할 것이며 서류는 꼼꼼하게 잘 낼 것이다 갚아야 할 대출이라거나 하는 것은 여기에도 남을 테다
내가 죽으면 서울 서쪽 병원의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모여 웃거나 울 것이다 아직 젊은 축이니 우는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갈수록 울 일이 없으니 이를 기회 삼아야 할 테다
내가 죽으면 이런 방식의 자연사를 기리면 좋겠다 그날 아침도 그는 회사에 가기 싫어했으며 그 싫어함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아침이었다고 그것은 자연의 귀감이 될 테다
내가 죽으면 덤프트럭이 좌회전하기 전에 내가 스마트폰을 들어 트위터 새로고침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길 바란다 알 만한 사람도 없고 궁금해할 사람도 없을 테다
내가 죽으면 어린 딸들은 없는 아빠를 찾아 무척이나 울다가 그 울음이 몸에 스며들어 문득 부서질 듯 아프기도 하겠지만 세상에는 미안하지만 미안해할 수도 없는 일도 있을 테다
**친밀감 / 최문자
점점 사람들을 벗어난다
오히려 짐승에게 친밀감이 생겼다
이수역 모르는 골목에서 만난 검은 개
그 개는 주인이 불러도 오지 않았다
어제
그가 불러도 내가 가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해 보면
그 개는 개가 아니다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어제도 내일도 내 것이 아닌 동안
어제도 내일도 개의 것이 안 되는 동안
없던 목줄이 생기고 없었던 자세로 끌려가는 동안
한 줌 털에게 한 줌 재를 섞는 동안
짐승의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우리는 숨을 헐떡이는 동안 친밀감이 생겼다
-계간 《파란》 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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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 1943년 서울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나무고아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사과 사이사이 새』 『파의 목소리』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등.
**전생기념관/이혜미
찢어진 깃발들이 휘날리는 국경일에
느리고 거대한 몸들을 생각한다
기일이 곧 생일인 세계가 있어
깊숙한 발자국을 미래로 보내기 위해
오래 나뭇가지를 씹는 초식 공룡처럼
바라볼수록 희미해지는
꿈속의 색깔처럼
그곳엔 손그네를 태워 주던 젊은 부모가 있고
지워진 얼굴들과 아름다운 파지들이 많아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저녁을 선물 받은 그림자처럼
희박해진 몸을 털고
전생을 기념하는 이상한 박물관에서
비대한 슬픔이 우리를 기다린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
노트 맨 앞장을 비워 두는 습관
어째서 생일은 한 번뿐일까
마음은 묻히기도 전에 발굴되는 화석 같았다
⸻계간 《시인수첩》 2020년 가을호
**나의 거룩/문성해
이 다섯 평의 방 안에서 콧바람을 일으키며
갈비뼈를 긁어 대며 자는 어린 것들을 보니
생활이 내게로 와서 벽을 이루고
지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조금은 대견해 보인다
태풍 때면 유리창을 다 쏟아 낼 듯 흔들리는 어수룩한 허공에
창문을 내고 변기를 들이고
방속으로 쐐애 쐐애 흘려 넣을 형광등 빛이 있다는 것과
아침이면 학교로 도서관으로 사마귀 새끼들처럼 대가리를 쳐들며 흩어졌다가
저녁이면 시든 배추처럼 되돌아오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도 거룩하다
내 몸이 자꾸만 왜소해지는 대신
어린 몸이 둥싯둥싯 부푸는 것과
바닥날 듯 바닥날 듯
되살아나는 통장잔고도 신기하다
몇 달씩이나 남의 책을 뻔뻔스레 빌릴 수 있는 시립도서관과
두 마리에 칠천원 하는 세네갈 갈치를 구입할 수 있는
오렌지마트가 가까이 있다는 것과
아침마다 잠을 깨우는 세탁집 여자의 목소리가
이제는 유행가로 들리는 것도 신기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닦달하던 생활이
옆구리에 낀 거룩을 도시락처럼 내미는 오늘
소독 안 하냐고 벌컥 뛰쳐 들어오는 여자의 목소리조차
참으로 거룩하다
⸺시집 『내가 모르는 한 사람』 (2020년 9월)
**기러기표/서정춘
나는 안다
이웃집 옥탑방의 빨랫줄에 걸려 있는 양말 한 짝이
바람 불어 좋은 날 하릴없이 펄럭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누군가가 안쓰러워진 양말짝에 기러기표 부표를 달아 주면
구만리장천으로 날려 버릴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것을
•⸺계간 《문예바다》 2020년 가을호
**멀리 먼 곳에 더 먼/전동균
나무를 휘감아 올라가는 덩굴들,
저것은 싸움일까 놀이일까
싸움이라기엔 즐겁고
놀이라기엔 어쩐지 장엄
싸움과 놀이 사이에 한 생이 있고
그늘은 때로 반짝이며 출렁이는데
나는 약봉지를 들고 서서
공복의 담배를 태우네
채혈주사기 속 내 피는 붉었으나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기억들
화물을 가득 싣고 덜컹 덜컹
공중을 달리는 검은 트럭들
짧은 휴식이 끝나면
남의 것 같은 몸을 데리고 나는 걸어가야 하네
오래 살았지만 낯선 도시와
스마트폰에 고개 묻은 사람들,
눈물로 켜지는 성전의 촛불들을 지나
멀리 먼 곳에 더 먼 곳이 있으니*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여기 이곳
키가 작고 얼굴이 까만 당신이
내 모습을 뚫고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지나가는 시간에게로
*오정국 시 「그곳이 어딘들」에서
ㅡ『시와시학』(202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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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균 :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 시 부문 당선.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등.
**장동건/권혁웅
1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나는 장동건 고소영 커플과 같은 스튜디오에서 결혼사진을 찍었다
그건 장동건과 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장동건과 같은 각도로 신부를 올려다보았다는 뜻
물론 만족스러운 높이를 위해
발밑에 쿠션이 필요했다
보라, 나는 장동건보다 더 많은 소품을 썼다
장동건은 장동건 만했지만 나는 나보다 컸다
신부 들러리가 자꾸 웃었습니다
내 마음은 세빛둥둥섬처럼 어리둥절했습니다
2
나중에 창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들 현빈만 보았지만 현빈은 현빈이니까 멋있는 거지
장동건은 좀비가 되어서도 멋있네
이럴 때를 위해 꼭 한 번 이 말을 쓰고 싶었다
개멋있네
3
비밀 하나 더 알려줄까
친구에서 장동건이 칼빵 맞기 전에 유오성에게 날린 유명한 대사,
니가 가라 하와이
그 말을 듣고 하와이에 다녀왔다
보라, 장동건은 하와이에 못 갔지만 나는 갔다
하와이에서 화장실에 핸드폰을 놓고 나왔다가 잃어버렸다
1분도 안 지나서 되돌아갔는데 없어졌다
누가 집어갔다, 똥도 안 누고
그래서 장동건에게 전화를 못했다
몇 년 후에 하와이가 분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4
거울을 보며 내가 니 시다바리가?
이 말을 몇 번이고 연습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내가 니 시다……
그래 이것이 장동건에 관한
내 시다
아무리 흔들어도 장동건은 돌아보지 않고 대신
유오성이 대답했습니다
죽고 싶나?
마음이 용각산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시 전문 계간지 《딩아돌하》 2020년 가을호
ㅡ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창작
ㅡ뚜렷한 목표 설정
ㅡ에너지 자작 북돋기
ㅡ습작 다작으로 늘 예열
ㅡ퇴고시 뜸 들이기, 자주 보기보단 묵혔다 보기
ㅡ퇴고시 컴 모니터상보단 출력하여 지문으로 보기
ㅡ습작 취지 초심 유지하기
ㅡ글에서 노인냄새 안내기
ㅡ문을 치열하게 두드리기
*등단이란,,,7순때 시집 발간와 시낭송회
*2020년 토지 문학제 시 당선작
**물때/신재희 (본명 신춘희)
느리게 다가오는 물의 걸음
물의 속도가 멈춘 자리 계곡의 바닥이 미끈거린다
거세게 흐르지 못하는 물길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머뭇거렸을까
물의 엉덩이가 닿았던 자리마다 물때가 끼었다
구불구불 휘돌아온 물소리를 먹고 자라는 돌들
줄어든 계곡물에 뒤척일 기력이 없어 안색이 누렇다
길쭉하거나
납작하거나
둥글거나
계곡의 슬하에서 뒹굴며 자란 물의 피붙이들
수면 아래 제 몸피만큼 걸쳐 입은 물때는
정체된 속도에 주저앉은 습생의 뿌리들이다
물의 허리를 잡다 발목이 휘청거린다
물의 지느러미도 낮은 곳을 따라 구부러질 뿐
찌든 물때는 쉬 벗겨지지 않는다
돌멩이 하나 집어
허물조차 껴안고 살던 숨결을 물에 씻는다
말간 얼굴을 드러내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살아난다
계곡의 물소리가 줄어들어도
고요히 파닥거리며, 뒤척이며
물의 때를 기다리는 돌멩이들
물때를 벗은 싱싱한 맥박이 손바닥을 타고 오른다
신재희(본명 신춘희)
경북 포항 출신
2018년「열린시학」신인상
ㅡ깊은 맛이 없다
*얼굴/이병률
하루 한 번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 얼굴 때문입니다
당신 얼굴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갑니다
어머니도 유전적으로 앉아 있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누구나 그렇듯 얼굴만으로는 고아입니다
당신이 본 풍경과 당신이 지나온 일들이 얼굴 위에서 아래로 차곡차곡 빛납니다
눈 밑으로 유년의 빗금들이 차분하게 지나가고
빗금의 각을 타고 표정은 파도처럼 매번 다르게 흐릅니다
얼굴은 거북한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안간힘 정도는 괜찮지만 계산된 얼굴은 안 됩니다
당신 얼굴에 나의 얼굴을 닿게 한 적 있습니다
무표정한 포기도 있는데다 누군가와 축축하게 헤어진 얼굴이어서였습니다
당신 앞에서 이유 없이 웃는 사이
나는 당신 얼굴이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 한 번 당신과 겹쳐지는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ㅡ『애지』(202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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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등.
ㅡ시인 자신의 자화상 뜯어 봄
ㅡ패러디 해 보기
ㅡ시,수필,소설 상호 연관성
*유리창의 세계사/송재학
유리에 처음 금이 갔을 때
창 너머
빈 화단에 꽃을 심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음이 소거된 계단처럼
창 너머 흑백 무늬가
소년이 되고 노인이 됩니다
유리창의 균열이 더 커지면서
손아귀에 우연히 붙잡힌 참새의 심장을 움켜쥔 셈입니다
부서지려는 유리가 지금 산산조각 나는 유리의 소리를 냅니다
파편을 끝까지 붙잡아야 하는
이유 중에 괴로운 얼굴이 있습니다
나도 얼굴 중에 조각난 혀를 붙잡았습니다
언젠가
유리창이 새 것으로 바뀌면서
잘 보이던 것들조차
원경이 되어 나와 무관해집니다
다시 유리에 금이 가면
창 너머 나와 가까워지려는 풍경들이 항상 탄생하는 걸까요
어쩌면 유리 너머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유리 안쪽이 아닐지,
부서진 유리와 부서질 유리만이
유리의 세계라고 믿었습니다이어도 좋을 겁니다
- 계간 《시와 사상》2020년 가을호
송재학
경북 영천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검은색』 『슬프다 풀 끗혜 이슬』외 다수
*비둘기에 대한 예의/김기택
차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비둘기는 비키지 않았다.
뻔히 타이어를 보면서도 날아갈 기미가 없었다.
아주 느리게 다가가면서 위협했지만
먹이를 향한 순도 높은 집념과
수많은 구두들을 다 비켜가게 했던 배짱이
타이어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아침부터 피와 깃털로 타이어를 더럽힐 수 있는지
물컹거리며 짓뭉개지는 느낌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지
할 테면 얼마든지 해보라는 기세였다.
과자 부스러기를 쪼는 부리에 몸통이 단단히 박혀 있어서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질 것 같지 않았다.
급하게 차를 피했다가는
먹이에 붙어있는 부리에서 머리통이 우두둑 뜯겨버릴 것 같았다.
뒤차가 빵빵거렸지만
먹이 쪼는 부리는 바닥에 둔 채
몸통만 다급하게 날아오르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저 몰아일체와 무아지경을 깨트리고
성실한 노숙을 방해할 권리가 나에게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보험을 두둑하게 들어놓고
비둘기 자해공갈단이 어디엔가 숨어서 지켜볼 것 같아서
귀찮은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타이어는 이빨과 발톱을 등과 무릎처럼 둥글게 구부리고 앉아
다른 비둘기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비둘기가 어서 식사를 마쳐주기를 기다렸다.
ㅡ《시인시대》 2020년 가을호
ㅡ과자부스러기를 쪼는 부리에 몸통을 박고~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핥을 때/김기택
입에서 팔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연약한 떨림을 덮는 손이 나온다.
맘껏 뛰노는 벌판을
체온으로 품는 가슴이 나온다.
혀가 목구멍을 찾아내
살아 있다고 우는 울음을 핥는다.
혀가 눈을 찾아내
첫 세상을 보는 호기심을 핥는다.
혀가 다리를 찾아내
땅을 딛고 설 힘을 핥는다.
혀가 심장을 찾아내
뛰고 뒹구는 박동을 핥는다.
혀가 나오느라 꼬리가 길다.
혀가 나오느라 귀가 빳빳하다.
혀가 나오느라 발톱이 날카롭다.
⸺《문장웹진》 2020년 5월호, 월간 《현대시》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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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1957년 경기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소』『껌』『갈라진다 갈라진다』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입술들은 말한다/나희덕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죽음에 대해
오늘 저녁 먹은 음식과
산책길에 만난 노을빛에 대해
기후위기와 정부의 부동산대책에 대해
생일과 장례, 술과 음악, 책과 영화, 개와 고양이에 대해
마을을 휩쓸고 간 장마비에 대해 파도소리에 대해
얼굴도 없이 몸뚱이도 없이
격자무늬 벽에 처박힌 채 입술들은 말한다
거미처럼 분비액을 뽑아내는
저 입술들은 대체 어디서 모여든 것일까
각기 다른 언어로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기 다른 리듬으로
목소리들은 서로 삼키고 뱉고 다시 삼키고 뱉고 삼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소음의 벽을 향해
중얼거린다
들리지 않는 노래를 너무 많이 들었나봐
귀가 먹먹해
먼 들판에 풀벌레소리 자욱해
못이 박힌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나봐
귀는 매일 투명한 피를 흘리고 닦아내고 다시 흘리고
격자무늬 벽 속에서 입술들은 말한다
오늘도 잠 못 드는 이유에 대해
왜 자신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지에 대해
복용해온 약에 대해
또는 피 흘리는 말, 다른 입술들에 대해
ㅡ『시와 반시』(2020, 가을호)
ㅡ나희덕/고아원원장딸로 고아아닌고아로 모정을그리워함
**그릇/안도현
1
사기그릇 같은데 백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담아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하지만 벌써 버릴 수 없는/장옥관
섭씨 38도를 오르내리던
오후의 골목길
밀차에 기대어 걷다가 서고 걷다가 쉬며
다가온 주름살투성이 할머니
가쁜 숨 몰아쉬며
날 보고
짜장면 파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하지만 벌써 버릴 수 없는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남아 있는
기적 같은 날들이다
계간 《문학동네》 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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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관 /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황금 연못』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등.
**결/송용탁(제3회 남구만 신인문학상 당선작)
빈 도시락 통이 다리를 퉁퉁 칠 때면 무릎 근처에서 달그락 물결이 일었다. 학교 마른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길은 흐르고 나는 고인다. 이름 모를 꽃들이 내 이야기를 엿듣곤 했다.
결이란 말은 혼자서도 혼자가 아닌 마음
늘 골목 끝에 서 있던 엄마가 없다. 세상의 숨결이 겉잎을 버리는 시간. 혼자라는 속잎이 있다. 시시한 놀이가 거친 숨결을 달랜다. 견뎌야 하는 목록이 늘어날수록 숨은 여러 결로 쌓였고 숨을 내쉬기 힘든 무게가 있었다.
소실된 곳에 가면 세상은
나를 설득하고 싶은 모양이다
떠난 마음들이 사는 도래지가 있다고,
노을의 손을 잡고 뛰었다. 엄마의 살에서도 물결이 인다. 살의 결이 말을 걸어 올 때 길은 생이 아닌 다른 힘으로 걷게 된다. 엄마와 살이 닿으면 다 말하지 않아도 엄마는 알았다. 나는 혼자가 아닌 것 같아 응결된 마음이 눈물처럼 흘렀다. 세상의 길이 붉게
**스테이플러/최금진
루이15세는 왕가의 문장을 박아 넣기 위해 스테이플러를 생각했다
단호하게 제 할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스테이플러의 완고함은
노쇠한 자의 빛나는 틀니 같은 것이었다
때로 스테이플러는 환자의 벌어진 살집을 꿰매는 도구였다
살점 속에 흰 뼈가 비치는 살과 살을 엮어 봉합하면
혈관에서 뇌까지 뚫려 있는 상처의 흔적도 보수해 줄 것만 같았다
원고를 보내기 위해 복사된 종이들을 스테이플러로 찍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함구령을 내리듯 변명의 여지가 없는 문장들이
나를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봉투에 종이뭉치를 넣고
다시 한 번 더 철심을 박아 쿵쿵 밀봉을 하고 나면
시간의 한 마디를 꺾어 다음 마디에 이어붙이는 기분이 든다
스테이플러를 열면 수많은 ㄷ자 형태의 문고리들
어떤 문도 쉽게 타인을 통과시키진 않는다고,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살아온 날의 절반을 구부려서라도 전보다 더 단호해져야 한다고
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버릇
그것은 어떤 트로피보다 영광스럽게 나를 붙잡아 놓았다
팔뚝 흉터에 난 스테이플러 자국들을 험상궂게 까 보이면서
한 번 떠난 곳으론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고 나는 다른 안쪽을 닫아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은 무수한 쇠못들 같았다
쿵쿵, 당신을 봉투에 넣고 스테이플러를 찍는다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선 가까운 인근부터 잘 고정시키고 봉해야 한다
그리고 차가운 철심들이 구부러지는 각도처럼
뭔가를 접어야 할 때는 손과 허리를 굽혀 힘을 줘야 한다
스테이플러 안에 가득 쟁여둔 폐쇄의 욕망들이
실은 너무 쉽게 뜯길 것을 두려워하는 연약한 종이의 울음이란 걸 알기에
나는 어디서든 이빨을 앙다물고 웃는다
⸻계간 《시와 반시》 2020년 가을호
최금진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신인상에 시 당선.
시집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
이발사의 세 번째 가위
박지웅
평생 남의 뒤에서 살았다
이발사는 뒤에서 웃는 직업이다
이발소로 흘러든 것이 구름이라도 깍듯이 대접한다
등 굽은 이발사는 낙타 뼈로 깎은 빗과 세 번째 가위를 들고
벽에 길게 덮인 거울로 들어간다
대개 구름은 희미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머리칼을 칠 때마다 약간의 물소리가 빠져나간다
손님과의 대화는 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가위는 은빛 날개를 한 비행기처럼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그때마다 구름은 머리채 부드럽게 흔들며 눈을 가늘게 뜬다
가죽 의자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듯하지만
이발 보자기 걷으면 구름은 어느새 걷히고 없다
뭉클하게 잘려나간 것을 쓸어 모으면
바닥에 낙타처럼 웅크린 것들은 파랗게 눈 뜬다
일찍이 이발사는 부모가 솜구름을 타 이불 속에 숨기는 것을 알았다
어린 그는 자주 울면서 농에 들어갔다
거기에 아이들이 꽃다발처럼 이마를 붙인 채 울고 있었다
뭉게뭉게 어둠과 뭉쳐진 무늬들이 목관에서 흘러나갔다
낙타는 등에 구름을 얹고 산다
베두인들은 비가 꼭 필요해지면 낙타의 혹을 찌른다
구멍에서 흘러나온 검은 구름을 마시는 꿈에서 이발사는
세 번째 전생을 보았다
그 생애에서 그는 나무피리로 흰 낙타를 불러 구름을 꺼냈다
죽은 것의 눈꺼풀 위에 돌을 얹고 한 줄로 된 현악기를 켜며
저 낭떠러지에 떨어진 쓸쓸한 음악을 한 번은 찾으러 가야지 마음먹었다
이발사가 묻힌 창에 몇 개 구름이 돌처럼 얹혀 있다
⸺월간 《현대시》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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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1969년 부산 출생. 2004년 《시와 사상》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너의 반은 꽃이다』『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검은 기린/김륭
“이 육체 속에서 우리는 무얼 한단 말인가.”
내 옆 침대에서 누울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ㅡ안토니오 타부키, 『인도 야상곡』
영혼을 다 써 버린 후 검은 연기처럼, 다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나는, 내 몸이 어떻게 지내는지
당신이 지새는 밤과 어떻게 섞이는지 보려고
내가 없는 내 죽음도 보일지 몰라 하얀 침대시트를 함께
말았던 당신의 죽음 또한
그러나 지금은 자는 게 좋겠다고
선반 위에 올려놓은 130g 햇반처럼 납작해지는
별, 하얀, 검게 그을리기 좋은
문득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 또한 돌아왔다고
나는 다 써버리지 못한 울음으로 가만히
두 눈을 꺼트릴 것이다
없는 아름다움도 막 팔아먹을 만큼 우린 참
식물적으로 아팠지, 이런 문장 하나쯤은 서로의 입에
넣어 줄 수 없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듯
검게 부러져 가는 서로의 목을
베개처럼 껴안고
나는 왜 자꾸 눈사람 머릿속이
검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ㅡ『시인수첩』(202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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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1961년 진주 출생.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원숭이의 원숭이』,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별에 다녀왔습니다』『엄마의 법칙』『첫사랑은 선생님도 일 학년』『사랑이 으르렁』.
**다이 하드/서효인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죽음을 생각한다
이곳에서의 사고사야말로 최대한의 자연사다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미친놈처럼 운전하는
사람이 꼭 있어서 평소에 안 하던 욕을 자연스레 사고처럼
하게 된다 저 새끼가 뒈질라고 환장했나
⸺《문장웹진》 2020년 10월호
내가 죽으면 보험회사 직원이 출동할 거고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덤프트럭 운전자에게도 선량함이 깃들어 있을 테고 중학생 자녀라거나 갚아야 할 대출이라거나 하는 게 있을 테다
내가 죽으면 아내는 보험회사에 서류를 제출해야 할 것이며 운전을 더욱 무서워할 것이며 서류는 꼼꼼하게 잘 낼 것이다 갚아야 할 대출이라거나 하는 것은 여기에도 남을 테다
내가 죽으면 서울 서쪽 병원의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모여 웃거나 울 것이다 아직 젊은 축이니 우는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갈수록 울 일이 없으니 이를 기회 삼아야 할 테다
내가 죽으면 이런 방식의 자연사를 기리면 좋겠다 그날 아침도 그는 회사에 가기 싫어했으며 그 싫어함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아침이었다고 그것은 자연의 귀감이 될 테다
내가 죽으면 덤프트럭이 좌회전하기 전에 내가 스마트폰을 들어 트위터 새로고침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길 바란다 알 만한 사람도 없고 궁금해할 사람도 없을 테다
내가 죽으면 어린 딸들은 없는 아빠를 찾아 무척이나 울다가 그 울음이 몸에 스며들어 문득 부서질 듯 아프기도 하겠지만 세상에는 미안하지만 미안해할 수도 없는 일도 있을 테다
**친밀감 / 최문자
점점 사람들을 벗어난다
오히려 짐승에게 친밀감이 생겼다
이수역 모르는 골목에서 만난 검은 개
그 개는 주인이 불러도 오지 않았다
어제
그가 불러도 내가 가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해 보면
그 개는 개가 아니다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어제도 내일도 내 것이 아닌 동안
어제도 내일도 개의 것이 안 되는 동안
없던 목줄이 생기고 없었던 자세로 끌려가는 동안
한 줌 털에게 한 줌 재를 섞는 동안
짐승의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우리는 숨을 헐떡이는 동안 친밀감이 생겼다
-계간 《파란》 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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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 1943년 서울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나무고아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사과 사이사이 새』 『파의 목소리』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등.
**전생기념관/이혜미
찢어진 깃발들이 휘날리는 국경일에
느리고 거대한 몸들을 생각한다
기일이 곧 생일인 세계가 있어
깊숙한 발자국을 미래로 보내기 위해
오래 나뭇가지를 씹는 초식 공룡처럼
바라볼수록 희미해지는
꿈속의 색깔처럼
그곳엔 손그네를 태워 주던 젊은 부모가 있고
지워진 얼굴들과 아름다운 파지들이 많아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저녁을 선물 받은 그림자처럼
희박해진 몸을 털고
전생을 기념하는 이상한 박물관에서
비대한 슬픔이 우리를 기다린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
노트 맨 앞장을 비워 두는 습관
어째서 생일은 한 번뿐일까
마음은 묻히기도 전에 발굴되는 화석 같았다
⸻계간 《시인수첩》 2020년 가을호
**나의 거룩/문성해
이 다섯 평의 방 안에서 콧바람을 일으키며
갈비뼈를 긁어 대며 자는 어린 것들을 보니
생활이 내게로 와서 벽을 이루고
지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조금은 대견해 보인다
태풍 때면 유리창을 다 쏟아 낼 듯 흔들리는 어수룩한 허공에
창문을 내고 변기를 들이고
방속으로 쐐애 쐐애 흘려 넣을 형광등 빛이 있다는 것과
아침이면 학교로 도서관으로 사마귀 새끼들처럼 대가리를 쳐들며 흩어졌다가
저녁이면 시든 배추처럼 되돌아오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도 거룩하다
내 몸이 자꾸만 왜소해지는 대신
어린 몸이 둥싯둥싯 부푸는 것과
바닥날 듯 바닥날 듯
되살아나는 통장잔고도 신기하다
몇 달씩이나 남의 책을 뻔뻔스레 빌릴 수 있는 시립도서관과
두 마리에 칠천원 하는 세네갈 갈치를 구입할 수 있는
오렌지마트가 가까이 있다는 것과
아침마다 잠을 깨우는 세탁집 여자의 목소리가
이제는 유행가로 들리는 것도 신기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닦달하던 생활이
옆구리에 낀 거룩을 도시락처럼 내미는 오늘
소독 안 하냐고 벌컥 뛰쳐 들어오는 여자의 목소리조차
참으로 거룩하다
⸺시집 『내가 모르는 한 사람』 (2020년 9월)
**기러기표/서정춘
나는 안다
이웃집 옥탑방의 빨랫줄에 걸려 있는 양말 한 짝이
바람 불어 좋은 날 하릴없이 펄럭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누군가가 안쓰러워진 양말짝에 기러기표 부표를 달아 주면
구만리장천으로 날려 버릴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것을
•⸺계간 《문예바다》 2020년 가을호
**멀리 먼 곳에 더 먼/전동균
나무를 휘감아 올라가는 덩굴들,
저것은 싸움일까 놀이일까
싸움이라기엔 즐겁고
놀이라기엔 어쩐지 장엄
싸움과 놀이 사이에 한 생이 있고
그늘은 때로 반짝이며 출렁이는데
나는 약봉지를 들고 서서
공복의 담배를 태우네
채혈주사기 속 내 피는 붉었으나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기억들
화물을 가득 싣고 덜컹 덜컹
공중을 달리는 검은 트럭들
짧은 휴식이 끝나면
남의 것 같은 몸을 데리고 나는 걸어가야 하네
오래 살았지만 낯선 도시와
스마트폰에 고개 묻은 사람들,
눈물로 켜지는 성전의 촛불들을 지나
멀리 먼 곳에 더 먼 곳이 있으니*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여기 이곳
키가 작고 얼굴이 까만 당신이
내 모습을 뚫고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지나가는 시간에게로
*오정국 시 「그곳이 어딘들」에서
ㅡ『시와시학』(202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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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균 :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 시 부문 당선.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등.
**장동건/권혁웅
1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나는 장동건 고소영 커플과 같은 스튜디오에서 결혼사진을 찍었다
그건 장동건과 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장동건과 같은 각도로 신부를 올려다보았다는 뜻
물론 만족스러운 높이를 위해
발밑에 쿠션이 필요했다
보라, 나는 장동건보다 더 많은 소품을 썼다
장동건은 장동건 만했지만 나는 나보다 컸다
신부 들러리가 자꾸 웃었습니다
내 마음은 세빛둥둥섬처럼 어리둥절했습니다
2
나중에 창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들 현빈만 보았지만 현빈은 현빈이니까 멋있는 거지
장동건은 좀비가 되어서도 멋있네
이럴 때를 위해 꼭 한 번 이 말을 쓰고 싶었다
개멋있네
3
비밀 하나 더 알려줄까
친구에서 장동건이 칼빵 맞기 전에 유오성에게 날린 유명한 대사,
니가 가라 하와이
그 말을 듣고 하와이에 다녀왔다
보라, 장동건은 하와이에 못 갔지만 나는 갔다
하와이에서 화장실에 핸드폰을 놓고 나왔다가 잃어버렸다
1분도 안 지나서 되돌아갔는데 없어졌다
누가 집어갔다, 똥도 안 누고
그래서 장동건에게 전화를 못했다
몇 년 후에 하와이가 분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4
거울을 보며 내가 니 시다바리가?
이 말을 몇 번이고 연습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내가 니 시다……
그래 이것이 장동건에 관한
내 시다
아무리 흔들어도 장동건은 돌아보지 않고 대신
유오성이 대답했습니다
죽고 싶나?
마음이 용각산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시 전문 계간지 《딩아돌하》 2020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