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지/나의 이야기

펌/풀은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곽흥렬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9. 3. 3. 21:13

풀은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곽 흥 렬

 

   세상을 떠메고 갈 듯이 세차게 쏟아붓던 빗줄기가 잠시 가늘어졌다. 너누룩해진 틈을 타서 뒤꼍의 텃밭에 나가 보았다. 개망초를 앞세우고 바랭이와 쑥, 명아주, 비수리, 며느리밑씻개, 애기똥풀, 가막사리 같은 오만 잡초가 자기들하고 키 재기를 해보자면서 다투어 달려든다. 나는 아이 요놈들이!” 하고 타박을 주며 곳간으로 가 낫을 찾아 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수은주의 눈금을 쳐올리는 요즘 같은 철에는 풀과의 전쟁 상황으로 돌입한다. 풀은 자라는 속도가 실로 엄청나다. 베고 나서 돌아서면 또다시 베어야 할 만큼 놀라운 성장력을 보인다. 마치 눌러도 눌러도 끊임없이 고개를 쳐드는 오뚝이 같다. 하기에 도저히 감당이 불감당인 것이 풀이라는 생명체다.

   식물들의 생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하나의 유의미한 이법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풀은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그 생존 기간의 차이가 자라는 정도와 정확히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풀과 나무의 성장 속도가 서로 다른 까닭은 아마도 이 같은 차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개중에는 여러해살이풀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다수가 당년으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 운명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기에 그처럼 기를 쓰고 키를 키우는가 보다. 아니, 설사 여러해살이풀이라 할지라도 뿌리만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지상에 드러난 줄기 부분은 어차피 한 해로 안녕을 고해야 하지 않는가. 그에 반해 나무는 짧아도 수십 년, 길면 수백 년 동안 해마다 얼마큼씩 자라날 수 있음으로 해서 굳이 성장에 조급증을 낼 필요가 없어 보인다.

   비단 풀과 나무 사이의 차이만도 아니다. 나무들 간에도 성장 속도는 제각각이다. 한 해에 거의 사람 키 높이만큼씩 크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일 년 내내 자라 봐야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에 지나지 않는 나무도 있다. 빠르게 자라는 수종은 빨리 죽고 느리게 자라는 수종은 늦게 죽는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의 경우를 보면 크는 정도가 매우 느리다. 느리게 자라나다 보니 대신 그만큼 오래오래 삶을 누릴 수 있는 게다. 그에 비하여 오리목 같은 나무는 폭풍 성장을 보이는 까닭에 수명이 채 몇 십 년을 넘기지 못한다. ! 여기에 이런 절대의 비밀이 숨어 있었다니……. 대우주의 기막힌 조화에 탄복을 금치 못하겠다.

   사람살이인들 무에 다를 것인가. 사람 가운데도 너무 빨리 출세한 이들은 그만큼 빨리 꺾여 버리는 일이 항다반사이다. 그래서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소년등과일불행少年登科一不幸이라고 하여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과거 급제하는 것을 경계하였던가 보다.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말이 어찌해서 생겨났는지 그 연유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시절이 하 수상하다 보니 아직 제 갈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청춘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화젯거리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어느 작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고 하는 책으로 오늘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하려 들었다. 하지만 작가의 당초 의도와는 달리 값싼 감성팔이로 인해 위로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속에 불이나 지르지 않았으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싶다. 머리로 쓴 글이지 가슴으로 쓴 글이 아닌 것 같아서 도무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룰 거 다 이룬 배부른 돼지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뿐이다”, “현실도피적인 유희들을 힐링이라는 명목 하에 남발하게 만드는 책”, “잘 포장된 불쏘시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유의 혹평이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는 그를 두고서 청춘들을 팔아 자신의 배때지나 불린 인간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독자들의 이 같은 반응만 보더라도 어쩐지 겉껍데기의 번지르르한 말잔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막상 자신이 당자가 되었다고 가정하면 정작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그리 쉽게 나오겠는가. 터널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청춘들을 대할 때면 그저 애처롭고 안타까워 마음이 착잡해 온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솔직한 표현이겠다는 생각이다.

   불가에서는 우리네 인생을 일컬어 고해苦海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 고통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청춘들이 꼭 청춘이어서 아픈 것이 아니라 사람이어서 아픈 것이다. 이리 살피면 예의 책은 아예 전제부터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눈물로 밤을 지새워 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한 이 말은 어느 누구한테나 해당하는 가르침일 게다. 그러니 청춘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금언일 터이다. 청춘 역시 청춘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사의 이치가 이러할진대, 앞길이 불투명해 번민하는 청춘들에게 너무 닦달만 하려 들지 말고 그냥 가만히 지켜보아 줄 일이다. 꽃나무 가운데는 일찍 피는 개체도 있고 늦게 피는 개체도 있지 않던가. 일찍 피든 늦게 피든 어차피 때가 되면 피어날 것이고, 설사 당년에는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라 할지라도 해를 걸러서는 반드시 피우게 되어 있는 것이 그들이 지닌 미덕일지니. 그리고 꽃이 차례를 지켜서 피어나듯이 조금 참고 기다려 주면 그들도 언젠가는 어김없이 크고 탐스러운 꽃송이들을 주렁주렁 달게 될 것이리니.


<'고령문화' 제3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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