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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숲 11/13일 천양희-시집/새벽에 생각하다 발췌시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8. 11. 15. 02:05

인물

천양희 시인
출생
1942년 1월 21일 (만 76세)부산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졸업
데뷔
1965년 현대문학 '정원 한때' 등단
수상
2017 통영문학상 시상식 청마문학상  외 6건

**오늘 쓰는 편지-나의 멘토에게**

 

순간을 기억하지 않고 하루를 기억하겠습니다

꽃을 보고 울음을 참겠습니다

우울이 우물처럼 깉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장 슬픈 날 웃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겠습니다

혼자 사는 자유는 비장한 자유라고 떠들지 않겠습니다

살기 힘들다고 혼자 발버둥 치지 않겠습니다

무인도에 가서 살겠다고 거들먹거리지 않겠습니다

술 마시고 우는 버릇 고치겠습니다

무지막지하게 울지는 않겠습니다

낡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젊은것들 당장 따끔하게 침 놓겠습니다

그러면서 나이 먹는 것 속상해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습니다

결벽과 완벽을 꾀하지 않겠습니다

병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생의 전부인 듯 살겠습니다

더 실패하겠습니다

 

**바람의 이름으로**

 

땅에 낡은 잎 뿌리며

익숙한 슬픔과 낯선 희망을 쓸어버리는

바람처럼 살았다

그것으로 잘 살았다, 말할 뻔했다

 

허공을 향해 문을 열어놓는 바람에도

너는 내 전율이다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그것으로 잘 걸었다, 말할 뻔했다

 

바람 소리 잘 들으려고

눈을 감았다

그것으로 잘 들었다, 말할 뻔했다

 

바람은 나무 밑에서 불고

가지 위에서도 분다

그것으로 바람을 천하의 잡놈이라, 말할 뻔했다

 

**나는 기쁘다**

 

바람결에 잎새들이 물결 일으킬 때

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신비의 깊이를 느꼈을 때

혼자 식물처럼 잃어버린 것과 함께 있을 때

사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을 때

욕심을 적게 해서 마음을 기를 때

슬픔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울 때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올 때

무언가 잊음으로써 단념이 완성될 때

벽보다 문이 좋아질 때

평법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을 때

하늘이 멀리 있다고 잊지 않을 때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나는 기쁘고

 

막차 기다리듯 시 한 편 기다릴 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

 

**물에서 길을 묻는다-집착한다는 것**

 

세상의 감정 중에 집착이 가장 무섭다고 누가 말했지요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든 집착하지 않기로 했지요

날마다 욕심 버리면서 무심하게 살았지요

무심하게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욕심은 갈수록 줄어들지 않고

집착은 집요하게 매달렸지요

누가 경쟁 속에 뛰어들기라도 하면

여파는 나에게까지 미쳤지요

그때 나는 사는 일이 죽는 일보다 어렵다는 말을 생각했지요

새면서 날지 못하는 거위를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잡초들을 언뜻 보았지요

바람에 휩쓸리고 추위에 웅크리고 있었지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집착을 버리면서 사는 일이었지요

그제야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기 때문이란 걸 겨우 알았지요

집착할수록 삶은 더 굽이쳤지요

오늘도 나는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지요

중심을 잡고 싶어 잡아가고 싶어

 

**그럴 때가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집에 앉아서 집에 가고 싶다는 혼잣말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나를 놓칠 때가 있다

시 씁네, 하고 스스로 고립될 때가 있다

마음 놓고 사무칠 수도 없을 때가 있다

느닷없이 검은가슴물떼세가 생각날 때가 있다

자주쓴풀이 자주 떠오를 때가 있다

무엇보다 내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가지가 찢어지도록 밝은 달이

비틀거리면 우짜노, 하면서

나를 비춰주신다

 

**잘 구별되지 않는 일들**

 

쑥부쟁이와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잘 구별되지 않고

나팔똧과 매똧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가 잘 구별되지 않고

미모사와 신겨오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안개와 는개가 잘 구별되지 않고

이슬비와 가랑비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가리와 두루미가 잘 구별되지 않고

개와 늑대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적당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이 잘 구별되지 않고

잡념 없는 삶과 잡음 없는 사람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평생 바라본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구별 없는 하늘에 몰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것은 쓴맛의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지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에

대답처럼 떨어졌습니다

 

**생각이 달라졌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音色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웃음의 절정이 울음이란 걸 어둠의 맨 끝이

빛이란 걸 알고 난 뒤

내 독창이 달라졌다

 

웃음이란 이따금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는 생각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별처럼

나는 골똘해졌다

 

어둠이 얼마나 첩첩인지 빛이 얼마나

겹겹인지 웃음이 얼마나 겹겹인지 울음이

얼마나 첩첩인지 모든 그림자인지

 

나는 그림자를 좋아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졌다

 

**저녁의 정거장**

 

전주에 간다는 것이

진주에 내렸다

독백을 한다는 것이

고백을 했다

너를 배반하는 건

바로 너다

너라는 정거장에 나를 부린다

그때마다 나의 대안은

평행선이라는 이름의 기차역

선로를 바꾸겠다고

기적을 울렷으나

종착역에 당도하지는 못하였다

돌아보니

바꿔야 할 것은

헛바퀴 돈 바퀴인 것

목적지 없는 기차표인 것

저녁 무렵

기차를 타고 가다

잘못내린 역에서

잘못을 탓하였다

 

나는 내가 불편해졌다

 

 

**그때가 절정이다**

 

하늘에 솔개가 날고 있을 때

지저귀던 새들이 숲으로 날아가 숨는다는 걸 알았을 때

경찰을 피해 잽싸게 골목으로 숨던

그때를 생각했다

맞바람에 나뭇잎이 뒤집히고

산까치가 울면 영락없이 비 온다는 걸 알았을 때

우산도 없이 바람 속에 얼굴을 묻던

그때를 생각했다

매미는 울음소리로 저를 알리고

지렁이도 심장이 있어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알았을 때

슬픔이 비길만한 진실이 없다고 믿었던

그때를 생각했다

기린초는 척박한 곳에서만 살고

무명초는 씨잇으로 이름값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가난을 생각하며 ' 살다 ' 에다 밑줄 긋던

그때를 생각했다

제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고

햇빛 마주 보며 걸어갔던 시인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 것이 시라는 걸 알았을 때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던

그때를 생각했다

 

돌아보면

그때가 절정이다

 

**놓았거나 놓쳤거나**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 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뿐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물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 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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