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시숲-171214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7. 12. 16. 00:33

**30cm/박지웅**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거리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거리
눈빛이 흔들리면 반드시 들키는 거리
기어이 마음이 동하는 거리
눈시울을 만나는 최초의 거리
심장 소리가 전해지는 최후의 거리
눈망울마저 사라지고 눈빛만 남는 거리
눈에서 가장 빛나는 별까지의 거리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거리
눈 감고 있어도 볼 수 있는 거리
숨결이 숨결을 겨우 버티는 거리
키스에서 한 걸음도 남지 않은 거리
이 거리는 어데에서 왔는가
누가 30cm안에 들어온다면
그곳을 고스란히 내준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진술에는 묘사와 진술이 있다. 묘사에는 서경적/경치를 그리는 방법, 심상적/마음으로 형상화, 그리고 영상조립적 방법이 있는데, 서경적인 방법의 장단점은 창의적, 상투적, 주관적, 그리고 작위적이다. 위 시/30cm는 묘사와 진술을 아주 잘 혼용한 시

 

**봄날의 대국**

 

동파랑에 매화가 피었답니다

하늘이 어깨를 낮추고 남쪽에 첫수를 놓았답니다

 

동막골에 저수지가 풀렸답니다

땅도 손을 풀고 북쪽에 한 수 놓았답니다

 

포석에서부터 은근히 향기가 납니다

물릴 수 없는 한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벌서 반상 좌변에서 목련과 꽃샘바람이 불었습니다

거기다 봄비까지 보태니 목련은

아예 흰 허벅지를 젖히고 경쾌하게 달아납니다

 

목련의 세력이 한풀 꺾이자

과감히 손을 빼고 우변에 철쭉을 올립니다

하늘이 종달새를 부르니

땅이 기다렸다는 듯 뱀을 풉니다

이럴 때에는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활의 대국이 아니라 생활의 대국

서로 살 길을 열어주면서 다툽니다

땅은 두터움에 앞서고 하늘은 가벼움에 앞섭니다

 

두 기사가 한 수씩 주고 받습니다

큰 곳을 차지하고 땅이 동태를 살핍니다

힘겨루기에 밀린 하늘이 한참 수읽기를 하더니

드디어 구름을 걷어붙이고

봄 바다에 햇빛을 한 수 놓습니다

땅이 산처럼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봄 바다를 들여다봅니다

 

그렇게 봄날은 갑니다

 

**출전/박지웅**

 

텔레비전에서 박지성 경기를 중계하고

나는 등 돌리고 앉아 시를 쓴다

반지하 창가에 관중처럼 몰린 눈발들

날카롭게 내 시의 측면을 파고드는

흥분한 해설자 목소리를 라인 밖으로 차내고

나는 가까스로 시를 지키고 있다

생각을 길게 끌다가 도중에 차단되고

해설자는 내 시를 몰고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몸을 돌려 황급히 수비 위치로 돌아간다

배후를 파고드는 패스를 간신히 끊어

허둥지둥 텔레비전 밖으로 빠져나온다

주심이 뒤따라오며 마구 호각을 불어대고

창가에서 야유가 쏟아진다

뒤통수를 훌쩍 넘기는 위협적인 해설자의 크로스

그러면서 몇 번이나 실점 위기를 맞았다

나의 낱말들은 자꾸 엉뚱한 데로 굴러가고

운동장을 폭넓게 사용하지도 못하고

모처럼 온 기회도 살리지 못했다

아, 나의 빅지성은 지금 어디쯤 뛰고 있을까

체력이 고갈된 경기 후반은

시종일관 답답한, 심심한 경기를 이어갔다

해설자는 가끔 텔레비전에서 나와

어깨너머로 시를 기웃거리다 돌아가고

주심은 시계를 두 번째 들여다보고 있다

호각소리와 함께 시는 끝나고

창가의 관중들은 다시 눈발로 변한다

바람이 하얀 그물망을 흔들고 가버린다

 

**목련야구단**

 

봄은 언제나 홈런이다

담장 밖으로 넘어가니까

 

목련의 외야에 떨어진

하얀 공을 주워 들고

팬들은 덩달아 두 팔 치켜들고

집으로 달려간다

홈런이다!

 

그러니 저것은 꽃이 아니다

나무에 피어난 꽃은 정말

정말, 꽃이 아니다

나무 배트 바깥으로 넘어간 하얀 공이다

 

가끔 불운이 따랐고

실책에 이어 실점도 했지만

보아라, 봄은 전력이 막강한 팀이다

봄은 집념이 강한 팀이다

9회말 투아웃에 목련은 온다

봄이 목련을 포기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다

타자 목련이 들어서면

경기는 반드시 뒤집힌다

 

목련은 언제나 홈런이다

 

**나비를 읽는 법**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 뿐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증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시어의 중심 품사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사흘**

 

문상객 사이에 사흘이 앉아 있다

누구도 고인과의 관계를 묻지 않는다

누구 피붙이 살붙이 같은 사흘이

있는 듯 없는 듯 떨어져 있다

눈코입귀가 눌린 사람들이

거울에 납작하게 붙어 편육을 먹는다

사흘이 빈소 돌며 잔을 채운다

국과 밥을 받아 놓고 먹는 듯 마는 듯

상주가 사흘을 붙잡고 흐느낀다

사흘은 가만히 사흘 밤낮을 안아 준다

죽은 뒤에 생기는 사흘이라는 품

그 사흘 지나 종이신 신고

불 속으로 걸어가는 사흘이 있다

 

**그 사람을 내가 산 적 있다**

 

바람이 노을을 만지자 나비들이 태어났다

당신이 내 입술을 만지자 셀 수 없는 글씨들이 태어났다

 

입술을 빼앗긴 사람은

입술을 찾기 위해 훔친 자의 곁에 머문다

 

눈먼 사랑이 발아래 엎드려 우는 것을 본 적 있다

눈을 돌려달라고 눈 못 뜨고 울던

그 사람을 내가 산 적이 있다

 

내 이름은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함부로 당신을 만진 뒤의 일이다

 

**구름과 목련의 폐가를 낭송하다**

 

신이 내게 발행한 화폐는 슬픔뿐이다

수많은 가게를 돌아다녔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누군들 상처를 받고 싶겠는가

당신은 몇 번 위조한 흰 꽃을 내 머리에 뿌렸다

불분명한 흐린 목소리로 나는 시를 읊는다

당신이 내 목에 흰 벽을 바르고 젖은 지붕을 얹었는가

목구멍에서 시가 아니라 백골이 된 구름이 올라온다

나는 어쩌다 슬픔을 독차지하는 일자리를 얻었다

내가 그곳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림자들을 더 고용해 슬픔에 구애했다

시는 쓰디쓴 생에 내는 술값이겠거니, 내가 쓰리라 했다

내가 당신의 맨 앞자리에 앉아 슬픔을 필기할때

당신은 그름과 목련의 폐가가 있는 산마루를 가리켰다

발목에서 뒷덜미까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저 멸문을 써라

제 전부를 망치는 곳으로 가는 구름의 이름으로

군더더기 없는 멸망을 지나 푸르러지는 목련의 이름으로

나는 푼돈처럼 주머니 속에 넣어둔 시를 꺼내 읽는다

누가 이 슬픔의 관객이 되겠는가

 

**고래와 함께 걸었다**

 

겨우내 눈만 싣고 다니던 트럭

동네 뒷길에 버려져 큰 눈 맞더니

흰 고래가 되었다

 

무엇을 저리 애달피 부르는가

밤하늘 길게 가르는 고래 울음소리

 

얼어붙은 늑골을 쓰다듬으며

먼바다 어디 있었다는 고래의 땅을 떠울린다

 

고래는 물에 제 무덤을 만든다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걷고 싶었던 것이다

 

고래의 눈 안에 눈 내리고

상현달 아래 이동하던 식구들과

먼 외계로 날아간 어미 고래와

별과 별 사이에 힘찬 물줄기들

눈 속에 펑펑 내리는

희디휜 깊이에 나는 곧 묻혔다

그해 겨울에는 나도 아름다웠다

 

나는 고래와 함께 걸었다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는**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는 무단횡단을 하고 싶다

그래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단 마음이 초록불

빨간불 끄고 이편저편으로 다가가면 좋겠다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는 도로 수십 킬로미터가

맑은 여울로 바뀌면 좋겠다

바지 둥둥 걷고 들어가 은어 낚시를 하면 좋겠다

낚아챈 은어를 어영부영 다 놓치면 좋겠다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는 묶여 있던 개들이 모두 풀리면 좋겠다

갇혀 있던 새들이 동네 빵집으로 날아들면 좋겠다

펄쩍 뛰는 웃음소리로 아수라장이 되면 좋겠다

 

일요일에는 신문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

마음이 마음만 펼쳐 읽었으면 좋겠다

우체통에 키스로 봉한 편지가 꽂혀 있으면 좋겠다

그래도 아무일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는 큰 솥에 잔치국수를 삶다가 펑펑 울고 싶다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종이 위로 한 달이 지나갔다**

 

지면이 망연하다

지면 아래가 바로 심연이다

 

닻이라고 쓴다

백지에 글자 하나 출렁, 떨어진다

백지 밑으로 가라앉은 글자

해저에 쿡 박히는 글자

 

흔들리는 문장을 정박하고

선창가 술집으로 간다

이런 밤 색시에게 닻 내리고

나는 잔잔해진다

 

일찍이 나는

백지보다 깊은 산을, 백지보다 먼 바다를 보지 못했다

 

종이처럼 움켜쥘 수 있다면

삶은 벌써 내 손에 구겨졌을 것이다

 

종이 위로 한 달이 자나갔다

 

**백서/이문재**

 

죽음이 죽었다

 

죽음이 죽어서

죽음과 동떨어졌다

죽음이 죽음과 멀어졌다

 

죽음이 죽었다

삶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아서

죽음이 삶을 간섭하지 못해서

 

삶이 죽음과

함께 살지 못해서

죽음이 죽음으로 살지 못했다

죽음이 죽지 못하고 죽어서

삶이 삶으로 살지 못했다

 

죽음이 죽었다

삶이 죽음을 죽여서

죽음이 죽었다

죽음이 죽음을 죽여서

삶이 죽었다

 

삶이 삶을 살지 못해서

죽음을 죽이고

죽음이 죽지 못해서

삶을 죽였다

 

죽음이 죽었다 

 

**존엄한 이별**

 

이별이 부활해야 한다

이별의 손발에 박은 못을 빼내야 한다

이별이 다시 일어서야 한다

이별이 사랑처럼 사랑받아야 한다

 

이별이 걸어 다녀야 한다

돌아와서 사랑 곁에 함께 있어야 한다

 

이별이 사랑를 지켜야 사랑이 오래간다

사랑을 지키려면

먼저 이별을 지켜야 한다

 

사랑이 이별을 보살펴야 한다

이별을 잘 대접해야 한다

불러들여 좋은 밥을 먹여야 한다

이별이 살아야 사랑이 산다

이별이 건강해야 사랑이 별고 없다

이별은 거뜬해야 한다

이별은 든든해야 한다

사랑이 없어서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별이 제자리에 없어서

사랑이 제사리에 없는 것이다

 

이별 없는 시대가 종말이다

이별과 결별한 세상이 지옥이다

 

*이문재의 시 <백서> 오마주->오마주 [hommage]

다른 작가나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특정 대사나 장면 등을 인용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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