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餘韻)
조지훈
물에서 갓나온 여인(女人)이
옷 입기 전 한때를 잠깐
돌아선 모습
달빛에 젖은 탑(塔)이여!
온몸에 흐르는 윤기는
상긋한 풀내음새라
검푸른 숲 그림자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채는 부드러운 어깨 위에 출렁인다.
희디흰 얼굴이 그리워서
조용히 옆으로 다가서면
수지움에 놀란 그는
흠칫 돌아서서 먼뎃산을 본다.
재빨리 구름을 빠져나온
달이 그 얼굴을 엿보았을까
어디서 보아도 돌아선 모습일 뿐
영원(永遠)히 보이지 않는
탑(塔)이여!
바로 그때였다 그는
남갑사(藍甲紗) 한 필을 허공(虛空)에 펼쳐
그냥 온몸에 휘감은 채로
숲속을 향하여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한 층
한 층
발돋움하며 나는
걸어가는 여인(女人)의 그 검푸른
머리칼 너머로
기우는 보름달을
보고 있었다.
아련한 몸매에는 바람 소리가
잔잔한 물살처럼
감기고 있었다.
이 시에서 중심적 소재는 탑입니다. 달빛 아래 서 있는
탑의 모습은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물에서 갓나온 여인'
으로 바뀌면서, 종교적 심상인 성(聖)스러움과 관능적
심상인 성(性)스러움이 서로 자연스럽게 교감하고 있습니다.
달빛을 물의 이미지로 치환한 것은 시각의 촉각화이며,
'온 몸에 흐르는 윤기'를 '상긋한 풀냄새.로 옮기는 것도
시각적 이미지에서 후각적 이미지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공감각적 이미지는 문자 그대로 복합적 감각으로
시의 감각적 기능을 강화하면서 감각의 전이와 결합을
통해 시의 의미구조를 더욱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을 위의 시들로 알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