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사색의향기 / 작성일 : 2017-01-24 17:37 |
나만의 꿈 찾기 /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 아니다"
김영희 / '닥종이인형'에서 무한의 자유를 얻다
- 성경섭 방송인
나만의 꿈 찾기 /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 아니다"
무지개는 몇 가지 색깔일까? ‘빨주노초파남보’ 고사리 손을 하나씩 꼽아가며 무지개 색깔을 외우던 초등학교 미술시간을 기억하는 이라면 쉽사리 ‘일곱 색깔’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일곱 색깔이라고 알고 있는 무지개의 색깔은 실은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에서는 남색을 뺀 여섯 가지 색깔,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인은 흰색과 검은색을 포함한 '흑백청홍황(黑白靑紅黃)'’의 다섯 가지 색깔, 이슬람권에서는'청홍황(靑紅黃)'’의 삼원색에다 초록을 더한 네 가지 색깔, 아프리카인들은 단순하게 두세 가지 색깔로 무지개 색을 구분한다. 지금은 일곱 색깔이라고 하지만, 우리도 예전에는 ‘오색(五色) 무지개’라고 불렀다. 무지개처럼 형형색색의 온갖 못된 짓을 골라하는 사람을 이르는 ‘오색잡놈’도 거기서 유래한 것이다. 무지개 색깔이 나라나 민족에 따라 다른 것은 색채에 대한 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의 오색무지개는 전통음계가 ‘궁상각치우’의 5음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음양오행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가지 색으로 처음 분류한 사람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이다. 당시 사람들은 ‘빛은 흰색이고 물질이 띠는 색깔은 빛과 상관없는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프리즘 실험을 통해 ‘물질의 색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기존의 생각을 뒤집었다. 뉴턴이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깔로 구분한 것 역시 기독교문화의 영향이 컸다. 창조주가 7일 만에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 따라 7은 완벽하고 성스러운 숫자로 여겨졌다. 서양음악의 음계가 7음계로 구성된 것도 같은 이유다.
무지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무지개가 ‘일곱 색깔 무지개 꿈’처럼 우리의 꿈의 색깔에 비유되기 때문이다. 뉴턴의 ‘일곱 색깔 무지개’도 과학적으로 좀 더 정밀하게 분석하면 최대 207색까지 구분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회가 진화하고 발전할수록 우리의 꿈도 더 다양해지는 추세다. 노란 색 하나도 ‘샛노랗다’에서부터 ‘누렇다, 노리끼리하다’, ‘누르스름하다’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듯 인간의 꿈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르다. 이런 꿈들이 각자의 고유한 빛을 발산하면서 조화를 이룰 때 영롱한 무지개로 승화하는 것이다.
A Rainbow 무지개 - William Wordsworth 윌리엄 워즈워스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A rainbow in the sky 내 가슴 설레느니,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So is it now I am a man ; 어른이 된 지금도 매한가지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늙어가면서도 그렇지 않다면
Or let me die !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영국의 문호 워즈워스는 그의 시 ‘무지개(A Rainbow)에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한 까닭을 자전적 경험을 담은 ‘서곡’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아이들이야 말로 순수하고 능동적인 ‘우주의 동숙자’이자 영적 매력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획일적으로 통제되고 억압되면서 무한한 상상력이 굳어지고 쇠퇴한다고 본 것이다. 워즈워스에게 무지개는 동심으로 돌아가 원래 어떤 색이었는지도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빛이 바래고 희미해져 버린 꿈의 본디 색깔을 찾아가는 길잡이다. 워즈워스의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말은 꿈을 되찾기 위해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과 다름없다. 예전 얘기지만 아들을 낳으면 ‘장군감, 대통령감’으로 치켜세우던 때가 있었다.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어른들의 뜻을 따라 ‘의사 아니면 판검사’가 주종을 이뤘다. 행복은 성적순이 되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의대나 법대에 진학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내면의 행복보다는 외형적인 성공을 중요시하다 보니 아이들의 꿈은 획일적으로 주입된 단조로운 무채색 일색이 된 것이다. 요즘 들어 TV의 영향으로 드라마나 연예프로그램에서 인기를 얻는 ‘형사’나 ‘요리사’가 장래희망 우선순위에 끼어든 것은 그나마 예전과는 변화된 모습이다. 아이들의 미래는 곧 어른들의 현재다. 아이들의 꿈이 소중한 것은 바로 어른들의 현재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뉴턴으로 돌아가서...
“영국에서 흑사병이 돌던 1665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뉴턴은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느 날 고향집 뜰에 앉아 있던 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뉴턴은 ‘사과는 왜 곧바로 아래로 떨어질까?’ ‘위로 가거나 옆으로 떨어지지는 않는 것일까?’하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 끝에 뉴턴은 가지에서 떨어진 사과가 수직으로 낙하하는 것은 어떤 힘이 그것을 지면으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727년 로버트 그린이 출판한 ‘힘에 관한 저서’에 소개된 ‘뉴턴의 사과 (Newtons Apple)’ 이야기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평범한 농부의 아들, 그것도 유복자로 태어났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가 생활고를 겪다 재혼을 하자, 세 살 바기 어린 뉴턴은 할머니의 품에 홀로 남겨졌다. 형제자매 없이 홀로 자란 뉴턴은 책을 친구삼아 꿈을 키웠다. 시쳇말로 ‘금수저, 은수저’가 아닌 ‘흙수저’였던 셈이다. 뒤에 뉴턴에게 어떤 사람이 “당신은 어떻게 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뉴턴은 “나는 항상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무지개의 빛처럼 한 가닥 한 가닥이 선명하고 차별화된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신념을 심어 주면서 강력한 추동력을 가진다.
‘침팬지의 대모’라는 별명을 가진 동물학자 제인 구달(Jane Goodall)은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타잔’ 이야기를 즐겨 읽으며 언젠가 아프리카로 가서 동물과 함께 살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부모의 이혼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녀는 고교를 졸업한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그 꿈을 버리지 않았다. 23살이 되던 해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한 친구가 아프리카 케냐에 있는 부모님의 농장에 그녀를 초대한 것이다. 케냐로 건너간 그녀는 나이로비의 국립자연사박물관장인 루이스 리키(Louis Leakey) 박사를 찾아갔고 루이스 박사는 관찰력이 뛰어난 그녀를 조수로 채용했다. 그로부터 반세기에 걸친 침팬지 연구로 제인 구달은 세계적인 동물학자로 명성을 얻게 된다.
꿈 해몽에서 ‘하늘에 걸린 아름다운 무지개 꿈’은 무한한 가능성과 운기(運氣)의 상승을 의미하는 길조로 여겨진다. 꿈에서 본 무지개가 크고 선명할수록 찾아올 행운도 크지만, 무지개는 빨리 사라지기 때문에 꿈을 잡으려면 동작도 빨라야 한다는 것이 무지개꿈 해몽의 핵심이다. 미적거리다 보면 정작 ‘나만의 크고 선명한 꿈’을 놓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김영희 / '닥종이인형'에서 무한의 자유를 얻다
![]()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는 다섯 살 무렵부터 한지를 가지고 놀았다. 방이 많은 한옥에 살던 그녀는 겨우살이 준비가 시작되는 늦가을부터 시작되는 문창호지 갈이에서 쏟아져 나온 한지 파지를 가지고 인형모습을 만들었다. 파지를 물에 불리면 다시 한지 원료인 닥종이가 되는 것이다. 주로 쥐나 동물을 만들었는데, 사람 인형을 만들면 밤에 귀신으로 변한다는 얘기를 듣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드물게 ‘여성 우월론’을 펴는 페미니스트였던 아버지는 ‘여자로 태어나서 손재주나 놀리고 있는’ 그녀를 보며 좀 큰 포부를 가지라며 마땅치 않아 하셨다. 아마도 여성 대통령이나 퀴리부인 정도를 생각하신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든 닥종이 인형 만들기가 좋았다. 일곱 살이 되기 전엔 그녀의 첫 작품으로 기억되는 ‘엄마와 아기가 같이 가는 상’을 만들었다. 미술 선생이었던 큰 언니와 주변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녀의 닥종이 인형 작품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동그란 얼굴에 가는 눈매, 통통한 볼 마치 노래하는 듯 조그맣게 오므린 입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인형이라고 불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예술 작품이라기보다 상품이란 이미지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닥종이 인형’에 대한 세간의 큰 관심과 사랑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김영희의 닥종이 인형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온 곳이 독일이란 사실은 의외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14살 연하의 막내 동생 같은 독일청년과 사랑에 빠져 독일 행을 택했다. 어린 남편을 따라간 독일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비행기 삯도 없었고, 자존심도 상했다. 오죽하면 마흔 나이에 처음 술을 입에 댔을까. 할 줄 아는 건 닥종이 인형밖에 없는 그녀는 이삿짐에 함께 꾸려간 한지 40킬로그램으로 무조건 만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천년을 간다는 한지 닥종이의 특성을 잘 살린 그녀만의 작품세계는 독일 현지에서 인정을 받았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가지고 만든 가장 한국적인 인형은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물론 애가 셋이나 딸린 주부, 그것도 동양인인데다 현지 대학 출신도 아니고, 알아주는 평론가나 작품전을 열 갤러리도 없었던 그녀의 성공은 순전히 그녀의 꿈과 노력의 결실이었다.
김영희 작가의 ‘닥종이 인형’ 작품세계는 남다르다. 누구의 지도를 받은 적 없이 혼자만의 방법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케치로 작품 구상을 하는 남들과 달리 그 때 그 때 머릿속에 형상을 그려가면서 마음이 가는대로 자유롭게 만들어 낸다. 스케치를 하면 수시로 변하는 생각을 담아내기 힘들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그녀는 독일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등 유럽 각지에서 수많은 개인전과 그룹전, 퍼포먼스를 열면서 국제적으로 더 각광을 받았다.
그녀는 명성을 얻던 무렵 ‘어린 남편’과의 ‘불타는 사랑’을 소리 소문 없이 접었다. 재혼하고 두 아이를 낳았지만 고립무원의 이국땅에서 겪은 문화적 충격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이혼 사실을 10년 넘게 숨기며 왕성한 작품 활동과 함께 모두 다섯 아이를 키우는데 전념했다. 막내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분가하던 예순 살 즈음의 어느 날 그녀는 과감하게 ‘엄마를 졸업 한다’는 선언을 한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만세를 외칠 만큼’ 충격적인 이 사건이후 그녀는 그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매일 밤 절대 아프면 안 돼.. 감기가 유행할 때는 그때 죽으면 안 된다며 다짐을 했었는데, 이제는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던지..”
‘엄마 졸업’ 선언은 그녀의 작품세계에도 변화를 불렀다. 초심으로 돌아가 내 세상으로 날아 갈 듯 좋았다. ‘소녀적 환상’도 경험하면서 무르익고, 과감하고, 자유로워졌다. 새로운 사랑도 찾아왔다. 설레고 두려운 마음으로 연애편지를 쓰기도 했다. 예순 나이를 넘어서는 ‘왜 나는 조각만 해야 하나’하는 생각에 조각을 사진에 담아 회화작품에 접목시키는 ‘외도’도 했다. 처음엔 사람들 닥종이 인형이나 잘 만들지 왜 그러느냐고 반대를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새로운 작업은 예술가로서의 또 다른 경지라고 생각해요. 난 하고 싶은 걸 참으면 병이 들어요. 위험하다는 사람들의 말에 ‘잘 안되면 뭐 어때’ 배짱두둑하게 생각했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평론가들도 계속 그 쪽으로 가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의 생각이 바뀌었다. 초심을 찾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닥종이 작품에 전념하기 위해 ‘귀거래사’를 주제로 고희전을 열기도 했다.
“항상 저는 저 자신한테 물어봐요..그게 느낌이 안 될 때는 접어요. 후회는 없습니다. 억지로 하면 재미도 없잖아요.
그녀는 알고 보면 소설가이기도 하다. 이미 추리소설과 자전적 연애소설 ‘러브’..2권의 소설을 썼다. 격동의 시절을 배경으로 한 노년의 사랑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자신의 얘기를 녹여 넣은 작품이다.
이젠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지만 그녀는 가을도 겨울도 아닌 봄..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소싯적부터 청바지와 굽 높은 구두를 지금도 즐겨 입고 신는다. 생활고에 시달려도 멋 부리기는 평생 그녀를 따라 다녔다. 그 대신 옷을 살 때는 책도 한 권 사서 머릿속을 치장하기도 한다. 눈치 안보고 자신만의 작품을 하고 싶고, 개인박물관도 세우고 싶고, 연극 구상도 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평생 자신만의 찬란한 무지개 색을 품고 작품세계에 표현해 왔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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