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0.30 14:06
필자가 고 정주영 회장을 약 14년간 보필하면서 체험한 경험과 감동을 바탕으로 일화적 전기 “이봐, 해봤어?”라는 책을 낸 바 있다. 지금까지 약 5만부 정도가 읽혔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방송, 대학, 기업인 모임에서 그의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틈틈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강의 후 청중들이 자주하는 질문 중 필자가 답변하는데 늘 어려움을 겪는 질문이 있다. “초등학교 학력, 그리고 가출 소년으로, 부두노동자와 쌀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가 어떻게 그런 도전 정신, 통찰력, 번뜩이는 창의력으로 점철된 위대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나?”라는 질문이다. 그는 하늘이 낸 인물이다. 달리 대답이 없다. 이는 정 회장에 대한 피터 드러커 교수의 해답이기도하다.
참혹한 최빈 국가에 속했던 우리나라를 오늘의 선진 공업국 대열에 이르도록 발전시키는데 주역을 한 정 회장은 하늘이 우리에게 준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위대한 기업가 정신과 발자취를 돌아보는 데는 여러 가지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관되는 공통점이 있다.
참혹한 최빈 국가에 속했던 우리나라를 오늘의 선진 공업국 대열에 이르도록 발전시키는데 주역을 한 정 회장은 하늘이 우리에게 준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위대한 기업가 정신과 발자취를 돌아보는 데는 여러 가지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관되는 공통점이 있다.
둘째, 그가 이룩한 업적들은 대부분 한 기업가의 성공차원을 넘어 우리 경제사의 이정표를 바꿔 놓은 사업들이라는 점이다. 최악의 조건에서도 박정희 대통령과 교호하며 완성한 경부고속도로, 조선 사업, 자동차 사업, 석유파동을 맞아 국가의 외환 보유고가 겨우 3000만불 수준으로 국가 파산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주위의 반대와 조소를 무릅쓰고 중동 진출을 감행하여 나라를 구한 것들이 이에 속한다.
셋째, 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어 감히 다른 기업들이 엄두도 못내는 사업들을 과감하게 앞서 추진, 성공시킴으로서 다른 기업들이 뒤따르게 하여 한국경제 산업화의 활로를 트게 한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 공업과 중동 진출이다.
- 1982년 11월 4일 전두환 대통령과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울산 현대미포대단위수리조선소 준공식에 참석, 정주영씨의 설명을 듣고 있다./조선일보DB
그러나 이는 몇 해 후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사업을 추진할 때 한국에서 유일하게 고속도로공사를 해 본 업체로 그 주역을 담당하게 했다. 불어 닥친 해운업 불황으로 현대조선 초기에 선주들이 완성했으나 인도해 가지 못하는 배가 늘어났을 때 이를 상선으로 개조하여 현대 상선을 성공적으로 발족시켰다. 포드 자동차는 초기 현대자동차와 한국에서 조립생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장차 아시아 시장을 겨냥하여 현대를 자기들의 조립생산 파트너로 굳힐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점차 유리한 협상 입지확보를 위하여 일종의 길들이기 작전으로 현대자동차가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들을 내세워 정 회장을 압박해 왔다. 경영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당시 현대자동차가 국내 기업 중 최고의 세금 체납자였다는 사실이 당시의 형편이 얼마나 심각했나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자동차 독자개발이라는 출사표를 냄으로서 오늘날 한국 자동차 산업의 기원을 열었다.
다섯째, 그의 주요 업적과 발자취의 특징 중에 하나는 그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창의력의 무한한 가능성과 힘에 대한 신봉자였고 그 자신 철저한 실천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항상 고정관념과 교과서적 이론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며 이로부터의 일탈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는 사업에서 도전 요소를 대할 때마다 타고난 직관력과 복잡한 개념을 단순화하는 능력으로 획기적 발상을 했고 이를 과감하게 실천함으로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극적인 예가 폐 유조선을 이용하여 아산 방조제 물막이 마무리 공사를 하여 엄청난 비용절감, 그리고 공기를 단축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세계 토목 공사에 전례가 없는 ‘정주영 공법’이라는 새로운 장을 쓴 것이다. 앞서 언급한 조선 사업, 중동 진출, 자동차사업, 88올림픽 유치도 이에 속한다. 당시 이러한 사업들이 가지고 있었던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요소’들을 볼 때 그의 이러한 창의와 혁신정신 없이는 시작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일이 아주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그 일이 그만큼 해야 할 가치가 있고 그 열매 또한 크다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나 겨우 할 수 있다면 앞설 수 없으며 결국 도태되게 마련이다. 힘든 일을 앞에 놓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대들면 없어 보이던 방법이 보이고,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있는 길도 안 보이게 되는 거야.”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사업 안건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부정적인 자세를 보이는 간부에게 불편한 심기가 들 때면 정회장은 그의 위 아래를 훑어보며 그의 성과 직책을 생략한 채 “이봐, 해봤어?”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는 그의 이러한 정신이 농축된 질책과 독려의 표현이었다. 이는 서두에 언급했듯이 필자가 쓴 그에 대한 일화적 전기의 제목이 된 배경이기도 하다.
“아이고 박 사장, 그 소리 정 회장님 모시고 어려운 일 해내며 무수히 듣던 말인데 지금도 그 소리 들으면 가슴이 설레네.”
전에 그를 가까이 보필했던 현대그룹사의 옛 간부들이 이 책 제목을 접하고 하는 말이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과거 한국 경제 발전의 반세기 동안 한국에는 많은 대기업 총수들이 있었는데 한국 경제사를 바꾼 그런 큰 사업들을 정 회장이 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관점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결코 ”아니다”이다. 거기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
“정 회장이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와 뭘 모르고 저러는 거야. 성공할 리가 없는 그 일을 하다가 정회장이 망하는 건 둘째 치고 나라 망신시킬 일이 걱정이야.”
이것이 그가 조선사업, 중동진출, 자동차 독자개발, 올림픽 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때 한국의 기업계는 물론 관련 전문가 집단들이 취한 입장이었다는 점이 그 근거이다. 특히 그가 조선사업을 위해 동분서주 할 때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석학으로서 경제부처의 수장 자리를 맏고 있던 사람은 공식석상에서 “정 회장이 무리하게 추진하는 조선 사업이 성공하면 나는 열손가락에 장을 지지고 하늘로 오르겠소”라고 했다. 그랬던 그도 그의 타계 전에 출간한 그의 회고록에서 정 회장이 도전 정신과 획기적인 발상으로 한국경제에 크게 기여한데 대한 찬사를 남겼다.
분명 정주영 회장은 그 특성과 업적 면에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세기의 도전자이고 창의적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 위대한 인물이다. 우리는 그의 빛나는 면모들을 정신 유산으로 승계 받아서 도전의 용기, 창의력, 긍정적인 사고와 자신감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위대한 면모를 세계에 널리 알려서 우리의 우수한 잠재력과 기개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부각시켜야한다. 이것은 그의 업적을 누리고 사는 후대인 우리의 책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