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칸트의 동물원
1
꼬리를 밟지 않기에는
꼬리는 너무 길고 가늘고 아름답다
2
고개가 반쯤 기울어졌다면
그건 자세가 아니라 행위지
초록 스타킹은 탄력을 잃고
곧 허물어진다
두 다리는 반복적이지만
길은 곧 사라지지
서툰 것들은 피를 흘리고
내내 피를 흘리지
3
고양이와 나는
밤의 길목에서
따라 헤매고
밤낮없이 차들은 달린다
헤드라이트는 눈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104동을 기어오르는 달과
허물어지는 쓰레기 더미
뒤돌아보면 꼬리뿐인
고양이
4
한밤의 전화벨 소리
맥주병을 거꾸로 들고 깨던 사람이
갑자기 고요해진다면
얼마나 쓸쓸해질 것인가
하늘은 얼마나 새파랗게 금 갈 것인가
남의 머리통을 부수던 사람이
제 머리통까지 부순다면
얼마나 서러워질 것인가
한밤의 전화벨 소리
5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돈다면
그건 사라지는 놀이지만
사람들은 언제라도 중간부터
시작된다
지붕 위의 식사
- 어둠 속에서 프란시스의 얼굴을 보았지. 나는 나인 듯 프란시스에게 말을 걸어도 배경은 일그러지고.
나는 나인 듯
어느 맑게 개인 날에
시금치 삶고
북어를 찢는다
골목마다 장미가 피어나고
오후에는 차를 마신다
어느 맑은 날에는,
낮잠을 자고
어김없이 목욕을 하고
나는 또 나인 듯이
외출을 한다
나는 나에게 다 이른 것처럼
클랙슨을 울리고
정말 나인 것처럼
상스럽게 중얼거린다
국부적으로 내리는 비,
어느 날엔가 나는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빗방울은 말없이 떨어진다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손등을 어깨를 훔쳐본다
나는 나에게 이르러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내가 갈 수 없는 곳들의 지명을
단숨에 불러 본다
내가 나에게 이른 것처럼
마치 그런 것처럼
이상한 각도
밤에는 집들이 아주 작게 보여 저 가로등은 먼 곳에서
부터 항해를 하지 교회의 십자가는 푸르고 집들은 갈 데
가 없네
성냥갑 속의 삶을 노래하던 여가수는 어디로 갔을까 나
는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성냥을 가졌다고 생각해 그녀가
내게 마지막으로 담뱃불을 붙여 준다면......
썀쌍둥이처럼 호흡기를 나누어 가질까 내가 잘 구운 빵
을 먹고 싶을 때 당신은 밀가루로 둥글게 반죽을 하지 우
리는 조금 멀리 왔어 그리운 집으로부터 갈 수 없는 마을
까지
오래 서 있는 나무들, 속으로 피어나는 꽃들, 나는 길
을 떠나고 그 길 위에서 노래하지만 목소리가 곱지 않아
밤에는 연못을 파고 그곳에 불을 채우지 쪽박 쓰고 산
통 깨고 나는 날마다 목이 마르네 그리운 집으로부터 갈
수 없는 마을까지 우리가 흘러들었을 때
- 출처 : 이근화. [칸트의 동물원]. 민음사. 2006. pp.17-19, pp.30-31, pp.64.
<멍든 자국 >
우편함에서 걸어 나오는 나쁜 소식처럼
어지럽고 어려운 고양이
독자성을 버리지 못하고 걸어가는 저 낡은 포즈
고양이는 뜻없이 멈춰 서고
고양이는 뒤돌아본다
나는 시궁쥐의 공포 속으로
고양이의 발톱 밑으로
고양이는 부드러운 발길질을 멈추지 않고
계단의 높이
난간의 높이
담장의 높이
높이를 잃은 고양이들과
나의 데드마스크
어떤 자세로도 고양이는 추락하지 않는다
붉은 꽃잎 같은 고양이
길의 이쪽과 저쪽에서
고양이와 내가 살아가는 교묘한 방식
고양이는 나의 눈 속으로 제 발을 담그고
나는 나의 눈에 고양이를 묻는다
<피의 일요일 >
스킨헤드族이었고 샤넬의 새로운 모델이었던 그녀가 로
마 카톨릭에 귀의하여 사제의 발걸음을 배울 때, 일요일
의 종소리는 열두 시와 여섯 시에 한 번
나는 이 형식을 벗어나서 휴식할 수 없다
독일式 화이버를 쓴 남자는 일 초 전이나 일초 후의
내 자리를 지나고 휘파람을 씨익 불지만 저기 멀리 달아
나는 오토바이의 시간
오토바이는 오토바이의 형식으로 달리고
모래는 모래의 날들 위에 반짝인다
누군가 목격하였다고 해도 나는 같은 형식으로 잠들고
멀지 않은 곳에서 사제는 사제의 발걸음을 옮긴다 종소
리는 열두 시와 여섯 시에 한 번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 번씩 이를 뽑는 것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를 사랑한 개가 있고 나를 몰라보는 개가 있어
하얗게 비듬을 떨어드리며 먼저 죽어가는 개를 위해
뜨거운 수프를 끓이기, 안녕 겨울
푸른 별들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로 달려오고
그 별이 머리 위에 빛날 때 가방을 잃어버렸지
가방아 내 가방아 낡은 침대 옆에 책상 밑에
쭈글쭈글한 신생아처럼 다시 태어날 가방들
어깨가 기울어지도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이 들어
아직 건너보지 못한 교각들 아직 던져 보지 못한 돌멩이들
아직도 취해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자세로 새롭게 웃고 싶어
그러나 내 인생의 1부는 긑났다 나는 2부의 시작이 마음에 들어
많은 가게들을 드나들어야지 새로 태어난 손금들을 따라가야지
좀 더 근엄하게 내 인생의 2부를 알리고 싶어
내가 마음에 들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인생!
계절은 겨울부터 시작되고 내 마음에 드는 인생을
일월부터 다시 계획해야지 바구니와 빵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접시 위의 물은 마를 줄을 모르네
물고기들과 꼬리를 맞대고 노란 별들의 세계로 가서
물고기 나무를 심어야겠다.
3부의 수프는 식었고 당신의 입술로 흘러드는 포도주도
사실이 아니야 그렇지만 인생의 3부에서 다시 말할래
나는 내 인생이 정말로 마음에 든다
아들도 딸도 가짜지만 내 말은 거짓이 아니야
튼튼한 꼬리를 가지고 도끼처럼 나무를 오르는 물고기들
주렁주렁 물고기가 열리는 나무 아래서
내 인생의 1부와 2부를 깨닫고
3부의 문이 열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내 인생!
마음에 드는 부분들이 싹둑 잘려나가고
훨씬 밝아진 인생의 3부를 보고 있어
나는 드디어 꼬리 치며 웃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진화>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 성분은 놀랍다
나는 섭취한 대부분의영양을 발로 소비한다
내 두 발을 사랑해
열 개의 손가락을 오래 사랑했다
고부라지고 빈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내 몸의 물은 내 몸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 왔다
사랒디는 골목을 사랑해
오래 사랑했다
*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잡아 먹는
프레스機의 진화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동그라미가 되어간다
긴 손가락으로 긴 손가락을 잡으면
더 큰 동그라미들이 태어날까
더 많이 태어났다 오래 죽어 갈 수 있을까
천장위에 쌓이는 먼지들의 고고한 자세로
우리는 숨을 고르고 다시 손을 모은다
내 몸을 엉망으로 기억하는 이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기로 한다
*
우리는 일어나서 웃었다 나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나는 점점 더 물렁해지며 아무 냄새도 피우지 않는다
외로운 자들이 자꾸 명랑해지는 이유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
말이 없고 불만이 없는 자들이 사라질 미래를 향해 걸었다
저 나무를들어 올리면 몇 채의 집이 쓰러질까
저 산을 뽑아낼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았다
직선으로 내리는 비는 본 적이 없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돌고
우리는 안전하게 다시 웃었다
<꿈의 구장>
바람이 많아지고 몇 개의 모자가 날아가고 잠은 아주 얇아졌지 꿈의 커튼을 열고 날아오르는 야구공, 글러브, 부러진 방망이. 나는 베이스 런닝의 순간이 좋아 멀리서는 뚜렷했던 것들조차도 가까운 곳에서는 희미하지만
한 때 우리는 서로 아름답게 엉켜있었지 나는 길 위에서도 자주 눈가를 훔치지 길고 아름답게 풀려나가는 두루마기 화장지를 구장으로 날리고 싶어 아니면 깨진 병을. 가을 햇살이 떨어지는 보도블록을 걷고 있을 동안
신호는 내가 모르는 사이 바뀌고 차가 지나고 내가 건너고 다시 차가 지나지만 잠이 아주 얇아졌어 새벽에는 엄마가 한 번, 아버지가 한 번 나의 방문을 열고 나의 잠을 엿보시지 눈을 감고 계속 걷는다면 나는 어디에 이를까
플로리다의 하늘을 선명하게 가르는 야구공을 그려보지만 잠이 너무 얇아졌어 나의 잠 속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전광판 위에는 내 잠의 기록이, 나는 이제 꿈의 베이스 런닝을
써치 라이트를 받으며 공은 떠오르고 날아가는 새들은 꿈속인 듯 공과 만나지 나는 나의 긴 잠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지만 내가 걸어온 길 위에 마구 침을 뱉지 사람들은 점점 뜨거워지고
<아이 라이크 소팽>
시장 바구니에 커피 봉다리를 집어넣은 여자
빈 병에 커피를 채우고 커피 물을 끓이는 여자
커피 물이 끓을 동안 손톱을 깎는 여자
쇼팽을 들으면서 발톱마저 깎는 여자
커피 물을 바닥내고 다시 물을 올리는 여자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 물을 두 번 끓이는 여자
커피를 마시지 않는 저 여자
손톱을 깎으며 눈물을 보였던 여자
커피 한 봉다리로 장을 본 여자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던 여자
횡단보도 앞에 서서 오래 울었던 그 여자
빨리 건너지 않으면 더 오래 울게 될 거야
아직 건너지는 마 좀 더 울어야 되지 않겠어?
커피 봉다리를 들고 오래 울고 있었던 여자
이제 커피는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는 여자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여자
오래 서서 울게 될 여자 신호등이 될 저 여자
손톱 발톱이 마구 자랄 여자
<눈뜬 이야>
이 집 만두와 저 집 만두 사이
배달통과 전화벨 사이
오토바이의 시간과
신호등의 시간 사이
깜박이는 눈동자와 떠오르는 낡은 추억 사이
배기통의 푸른 연기와 날아가는 헬멧 사이
처녀와 처녀가 빼문 붉은 혀 사이
신호등과 플래카드와 피켓과 예수회의 구원 사이
사이사이 사라지는 무한정 아름다운 꼬리와 단 하나의 꼬리 사이
귀신과 귀신의 출몰과 출몰의 이야기 속의
당신의 공포와 공포의 색깔 사이
웅크림과 웅크림 속의 푸른 알약 사이
잊혀진 손맛과
사라진 만두 사이
입맛을 바꾸어 가는 사람들과
신호등이 예비하는 발걸음 사이
당신의 무고함이 울리는 오랜 경적 소리, 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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