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20615 문목 시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22. 6. 17. 23:14

1 문태준 시인/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 중에서

 

나는 시를 써온 지 30년이 넘었지만, 시를 쓰는 일이 매번 어렵다, 언어는 아주 예민하다. 그래서 언어를 다루는 시인도 극도로 예민해야 한다. *언어는 금방 도마뱀처럼 달아나고, 깎아놓은 사과처럼 색감이 변한다. 그래서 시인은 늘 마음이 조금 고양된 상태에 있도록 자신을 관리해야 한다. 다른 생활을 단순하게 해서 오직 시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성냥불처럼 잠깐 점화된 *생각을 수첩에 얼른 적어서 보관해야 하고, 구상하고 있는 시를 마치 바지 주머니에 넣어 다니듯이 늘 생각하며 마음에 지녀야 한다*. 버스 정류장에서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잠들기 전에도 시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관심이 사라지는 순간, 시는 줄행랑을 쳐 도망가고 마는 까닭이다.

 

2 낙원동/ 공광규

 

평생 낙원에 도착할 가ㅏㅇ 없는 인생들이

포장마차에서 술병을 굴린다

 

검은 저녁 포장도로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붉은

비닐포장 꽃에서

잉잉거리며 일벌 인생을 수정하고 있다

 

꽃 한번 피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열매도 보람도 없이 저물어가는

간이의자 인생을

술병을 바퀴 삼아 굴리는 사이

포장마차는 달을 바퀴 삼아 은하수 이쪽까기

굴러와 있다

 

*소주를 주유하고

*안주접시를 바퀴로 갈아 끼우고

*술국에 수저를 넣어 함께 노를 젓고

*젓가락을 돛대 세워 핏대를 올려도 

제자리인 인생

 

포장마차에 불을 끄자

죽은 꽃에서 비틀비틀 접힌

*몸을 펴고 나온 일벌들이

*술에 젖은 몸을 다시 접어 택시에 담근다

 

3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강영선

 

시어른이 돌아가시고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서

안부 전화가 왔다

 

노인정에 가기는 어정쩡한 젊은 노인에게 방을

내주어도 되냐고 동네 이장이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마당의 빈터는 앞집에서 농기구를 갖다 놓아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생가 감나무에 감이 무겁게 열리자 옆집에서

곶감을 좀 보내 줄 테니 감을 따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빈 닭장에 닭을 키우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전기도 수도도 끊어 놓은 그 집에 물이 들어오고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에서 가장

밝은 집이 된 빈집

 

빈집의 주인은 빈집인데

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물어 온다

 

떼 내지 않은 나무 문패는 옛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 있어

하늘 번지수를 동사무소 가서 물어야 할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4 삭제하다/ 전영임

 

누구 하나 기별 없는 전화기를 매만지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번호들을 지운다

*절두산 망니니 손이

*칼춤 추듯, 칼춤 추듯

*삭제한 낯선 이름 온 저녁을 붙잡는다

*단칼에 날린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아뿔싸, 목을 벤 후에

도착한 어명 같은

산다는 핑계 속에 까마아득 잊혀져간

*나는 또 누구에게 삭제될 이름일까

희미한 번호를 뒤져

늦은 안부 묻는다

 

5 매미 날리기/ 유인자

 

꼼짝없이 공부를 했더니

귀에서 매미 소리가 난다

맴맴맴맴맴맴, 맴맴맴맴맴맴

농구대에 공을 넣으며

매미를 한 마리씩 꺼낸다

 

맴, 맴,맴, 맴, 맴, 맴, 맴, 맴, 맴, 맴, 맴, 맴

귀에서 놀던 매미들이 다 날아간다

귀가 뻥 똫렀다

 

* 동시의 핵심 -단순, 간결, 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