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집밥'의 효능을 믿어주는 건 그래도 피붙이밖에 없는 것 같다. 따로 사는 손자가 오늘 할머니한테 가서 저녁 먹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올 때가 가끔 있다. 하는 일이 피곤한가, 뭐가 뜻대로 안 되나. 녀석의 목소리가 지친 듯 가라앉아 있다. 그럴 때 나는 막 신이 난다. 마치 내가 지은 더운밥 한 그릇이 녀석에게 새로운 기라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가슴이 설래고 으스대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못 말리는 늙은이다. ㅡ85쪽,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박완서 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