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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 하는 사이에/ 이규리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20. 3. 30. 10:54

 

저, 저, 하는 사이에/ 이규리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 시집『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문학동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