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191112 시 숲-이정록, 조병화, 이상국,마종기, 황지우,이기철 시 선 중심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9. 11. 13. 21:34

**뻘에 와서 소주를/이정록**

 

구멍 숭숭 지친 이여

충청도 바닷가로 오라

바닷물도 이 정도는 나이를 먹어야

새우젓이며 꼴뚜기를 곰삭일 수 있구나

한 세상 질떡거리기만 했다고

제 가슴에 거센 파도를 때리는 이여

드넓은 뻘 느릿느릿 밀려드는

바닷물을 보아라

구멍이란 구멍 다 들여다보고 뽀글뽀글 재미도 좋은 밀물을 보아라 

그 정 잊을 수 없어 내 나갈 때에는 진국 한 모금 남기고 가리

주거니 받거니 지치지 않는 사랑을 보아라

시작과 끝은 언제나 거품인 게야

바다의 출발선은 언제나 뻘탕물이다

뻘에 몸 문지르며 한 몸으로 섞이는 것이다

세상 더럽다고 불꾼 나앉은 그대여

사람 없는 저 먼 섬들이

그대 마음 씻어주려 솔 저리 푸른 것이니

퉁퉁거리며 돌아오는 작은 배엔

잠어 몇 마리 펄떡이고 있을 것이니

 

**의자/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추억/조병화**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늘, 혹은/조병화**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하게 채워 가며 살아 갈 수 있다는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녘 노을인가

 

**시를 파는 사람/이상국**

 

젊어서는 몸을 팔았으나

나도 쓸데없이 나이를 먹은데다

근력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요즘은 시를 내다 판다

그런데 내 시라는 게 또 촌스러워서

일년에 열 편쯤 팔면 잘 판다

그것도 더러는 외상이어서

아내는 공공근로나 다니는 게 낫다고 하지만

사람이란 저마다 품격이 있는 법

이 장사에도 때로는 유행이 있어

요즘은 절간 이야기나 물푸레나무 혹은

하늘의 별을 섞어내기도 하는데

어떤 날은 서울에서 주문이 오기도 한다

보통은 시골보다 값을 조금 더 쳐주긴 해도

말이 그렇지 떼이기 일쑤다

그래도 그것으로 나는 자동차의 기름도 사고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는데

가끔 장부를 펴놓고 수지를 따져보는 날이면

세상이 허술한 게 고마워서 혼자 웃기도 한다

사람들은 내 시의 원가가 만만찮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우주에서 원료를 그냥 퍼다 쓰기 때문에

팔면 파는 대로 남는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아서다

그래서 나는 죽을 때까지

시 파는 집 같판을 내리지 않을 작정이다

 

**있는 힘을 다해/이상국**

 

해가 지는데

왜가리 한 마리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녁 자시러 나온 것 같은데

 

그 우아한 목을 길게 빼고

아주 오래 숨을 죽였다가

가끔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 머릴 쳐박는 걸 보면

 

사는 게 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바람의 말/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우화의 강1/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히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밥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발작/황지우**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 때

오직 이 별에서만 포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奇籍기적 아녀

 

**안부1/황지우**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을 벗어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다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이기철**

 

달걀이 아직 따뜻할 동안만이라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사는 세상엔 때로 살구꽃 같은 만남도 있고

단풍잎 같은 이별도 있다

지붕이 기다린 만큼 너는 기다려 보았느냐

사람 하나 죽으면 하늘에 별 하나 더 뜬다고 믿는 사람들의 동네에

나는 새로 사온 호미로 박꽃 한 포기 심겠다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내 아는 사람이여

햇볕이 데워놓은 이 세상에

하루만이라도 더 아름답게 머물다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