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190312-시의 여백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9. 3. 13. 01:48

**옛날 우표**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먼 데 있는 그대에게 나를 태워 보낼 때

우표를 혀끝으로 붙이면

내 마음도 찰싹 붙어서 그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지 혀가 풀이 되어

그대와 나를 이었던 옛날 우표

 

그건 다만 추억 속에서나 있었을 뿐이지

어떤 본드나 풀보다도 더 단단히

서로를 묶을 수 있었던 시절

 

혀가 풀이어서

그대가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우리는 떨어질 수 없었지

 

혀가 풀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사람의 말이 푸르게 돋아

순이 되고 싹이 되고

아파리가 되어 펄럭이다가

마침내 꽃으로 달아올랐던 시절

 

그대의 손끝에서 만져질 때마다

내 혀는 얼마나 달아올랐을까

그대의 혀가 내개로 올 때마다

나는 얼마나 뜨거운 꿈을 꾸었던가

 

그대의 말과 나의 꿈이 초원을 이루고

이따금은 배부른 말떼가 언덕을 오르곤 하였지

세상에서 가장 맑은 바람이 혀로 들고

세상에서 가장 순한 귀들이 풀로 듣던 시절

 

그런 옛날이 내개도 있었지

 

**천관天冠**

 

강으로 간 새들이

강을 물고 돌아오는 저물녘에 차를 마신다

 

막 돋아난 개밥바라기를 보며

별의 뒤편 그늘을 생각하는 동안

 

노을은 바위에 들고

바위는 노을을 새긴다

 

오랜만에 바위와

놀빛처럼 마주 앉은 그대와 나는 말이 없고

 

먼 데 갔다 온 새들이

어둠에 덧칠된다

 

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

여기 있다

 

-시집 첫째 수록시로, 8년 만의, 8년 동안의 시를 만나는 감회와 소회를 피력

 

**늦가을 들녘**

 

널펑네 양반 돼지 한 마리 팔고 오는 길에

젤 먼저 국밥집 들러 막걸리 두되 마시고 현찰로 줘불고

밀린 술값까지 탈탈 털어 쥐알려불고

내친 짐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종재기골 양반네 막걸리값까지 개러불고

종묘상 들러 고추 모종값 갚어불고

지물표에 가서 지난저슬에 샀던 창호지값 벡지밦 지와불고

지전머리 단골 점방에 가서 묵은 외상값 즉에불고

빚내서 가기는 뭐했던 손지년 빗 한나 현찰로 사불고

걸레짝이 다 된 마누래 빤스 브라자에 지폐 몇장 불라불리다가

크음 하고 돌아서서 방엣간 떡값 밀린 것잉까레불고

농협에 가서 비료값 꼴랑지 짤라불고

집에 가불라고 차부에 들렀는데 널펑에 처삼촌을 만나불고 나서는

또 이바지로 과일 조깐 사서 엥게줄

대게 지갑 열어불고

쐬주 두벵 사 엄버줌서 괴춤 또 풀어불고

수퍼에 들러 음료수 두벵 삼서 조마니돈 털어불고

풍로 바람에 검불 날리대끼 다 까묵어불고

마침내 차표 한 장 딸랑 바까서는

빙골로

빙골로 돌아가는 저 늦가을 들녘

 

-경험을 전라도 순사투리로 재구성한 왠지 쓸쓸한 시

 

**사인事因**

 

당신의 이름을 지우려고 문지른 자리에 강이 생겼습니다

손끝 하나 스쳤을 뿐인데 숲이 운다고 합니다

가만가만히 속삭였을 뿐인데 꽃이 진다고 합니다

 

-사인/사건의 원인

-탐진/지명

 

**목련**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치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늙음에게**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눈이 가려 봅니다

 

귀가 먼 것이 아니라

귀도 제 생각이 있어서

제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다 내것이라 여겼던 손발인데

손은 손대로 하고 싶은 것 하게 하고

발도 제 뜻대로 하라고 그냥 둡니다

 

내 맘대로 이리저리 부리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준이 보여준 것만 보고

귀가 들려준 것만 듣고 삽니다

 

다만 꽃이 지는 소리를

눈으로 듣습니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보고

손으로는 마음을 만집니다

 

발은 또 천리 밖을 다녀와

걸음이 무겁습니다

 

**물의 경전-탐진 시편 2**

 

보아라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라

꽃이었다가 잎이었다가

녹슨 칼처럼 둗은 허였다가

흙이 되는 말씀을

 

언제 어느 때고 세월은 도둑처럼 다녀가고

물의 말씀을 화석으로 남기려다가

끝내는 물이 되어 흘러가는 무모한 사람들

 

마저도

 

물의 경전에서는 살아 있나니

 

보아라

서러운 것

바라는 것

생의 환희 같은 것이

다만 여백으로 기록된느 물의 경전을 보아라

바서지면 최르르 방울 소리 같고

튀어오르면 동글 별 사라기 같고

싹의 숨결 같은 말씀들이 또랑또랑 모여서

지금 흘러가고 있지 않느냐

 

외로운 자들이 흘러보낸 귀가

물낯에 노을 비늘로 듣는다

떠났던 소년들의 종알리가

여기 돋아나온다

 

가장 미워했던 얼굴이

연둣물 들어 햇잎으로 오고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눈동자를 잃고 *흐리로 괸다

 

사랑했던가?

행복했던가?

물으며 묻지 않으며

다시 태어나는 한방울의 죽음

 

모래알 같은 환희를 씻는

물의 경전을 잃어라

 

*흐리/습지, 수렁

 

**경호정**

 

어제는 풀꽃 향기가 발목을 쪼아 먹더니

아침엔 지빠귀 소리가 귀를 가져갔다

봄보다 느리게 흘러 강가로 가는데

파르랑 파르랑 흰나비가 눈을 데려가고

콧구멍은 매화 향기가 다 잡수셨다

경호정에 이르러 늙은 버들 새 가지에

순스름한 숨결들이다

호흡마저 놓쳐버리자

나는 아예 지워지고 강만 남았다

 

**똥이라는 말을 꽃이라는 말로 바꾸면**

 

똥이리는 말을 꽃이란 말로 바꾸면

아침마다 나는 꽃 싸는 사람이 되지요

 

물꽃도 싸고 된꽃도 싸고

어쩌다가 설사꽃도 좌르르

조팝나무 꽃떼처럼

내어놓기도 하지요

 

내가 꽃을 내어놓는 순간

세상은 꽃향기로 가득 차는 것 같지요

 

또 꽃이라는 말을 똥이라는 말고 바꾸면

 

감나무는 감나무똥을 싸고

사과나무는 사과나무똥을 싸지요

하늘을 채울 듯 싸놓은 보리수마무똥 틈으로

새들은 또 아침부터 노래똥을 싸질러놓았네요

 

세상의 거름 되는 일이

똥 싸는 일이고

꽃 싸는 일이라는 듯

 

아카시아 고 가시내

길 모롱이 돌아가는 곳에

또 꽃을 싸놓았네요

 

**창랑滄浪/탐진 시편3**

 

오래도록 물낯에 그림자를 놓아둔다

 

서늘한 물결은 함부로 흔들리고 마음은 습습하고 눈은 어둡다

 

아침엔 그대 그림자가 나를 안고 이내 멀어졌다

 

나는 산 아래에 있고 물을 내려다본다

 

산빛이 짙을수록 강색은 깊어진다

 

출렁이는 내 그림자는 흘러가지 않고 강에겐 발톱이 없다

 

내 그림자가 거대에게 닿을 무렵 우리의 날은 저물 것이다

 

 

**너무 꽉 끼고 구겨진 우울을 입은 저물 무렵**

 

문득,

먼지 하나에도 한 우주가 들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당신이 내게 말해봐, 라고 하였던 순간

 

나는 노을처럼 그저 있는데

말해봐, 라는 그 말은

 

내가 나에게서 조금 더 벗어나야 대답이 가능하리라는 것

그건 마치

너무 꽉 끼고 구겨진 이 우울을 벗어버리고

저 마지막 햇살을 향해

벌거벗고 뛰어가라는 신호 같았지

 

그게 당신이라는 별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노을이 좋군

대가 대답했지

 

당신은 엉킨 철사 뭉치를 내던지듯

답답함을 내 앞에 쌓기 시작했어

나라는 먼지와 당신이라는 먼지가

전혀 다른 별이라는 게 자명해지는

저물 무렵

 

이 저녁은 너무 꼭 낀 청바지 같아

숨이 막혀

 

당신을

맨 처음 어머니의 젖꼭지에서

죽음을 맛보았을 때처럼

엄마

혹은

맘마라고 부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깐

말해봐, 라는 말에

내 밖의 것만 생각했던 나는

내 생각 끝에 놀랐지

그건 내 안의 미지에 대한 것

 

아무리 속도를 내어도

나에게도 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

문득 차를 세우고 뒤돌아보았어

 

그때 당신은 말했지

어떤 그늘도 자기를 만들지는 못해

 

**발췌 시집/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창비 2018,8 발간/이대흠 시인

 

이대흠(李戴欠,1968~)전남 장흥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4년 창작과 비평에 <제암산을 본다>외 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먹고, 입고, 사는 문제였지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20년 정도 고향에서 살았고, 이후 10년 동안 서울에서 살았는데, 공장 생활 2년 후에 대학에 들어갔고, 건설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전문대를 나왔고, 결혼했고, 전문대 나온 후에도 건설 현장의 노동자로 일했고, 서울 생활 청산하고 광주로 내려와 10년 살았는데, 광주에서는 카페를 3년 정도 했고, 실패했고, 이혼했고, ‘리장닷컴’이라는 사투리 뉴스 사이트를 2년 정도 운영했고, 또 입체 지도 사업을 3년쯤 했고, 그 후 논술학원 2년을 했는데, 광주에서 사업한답시고 손댔던 일은 모두 실패했고, 몸뚱이 하나 남아 제주로 건너가서 4년 살았는데, 입시학원 강사생활 2년쯤 했고, 남은 2년은 다시 건설 현장 노동자로 일했고, 그 후 고향으로 와 여러 가지 강의를 하면서 1년쯤 버티다가, 문학관에 일용직으로 들어가 1년 반쯤 일하다가, 청원경찰이 된 지 1년 반쯤 되었습니다.”

([詩人의 詩] 이대흠, 월간조선 2014.9)

시집으로는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창작과비평,1997) 《상처가 나를 살린다》(현대문학북스, 2001), 《물속의 불》(천년의 시작, 2007), 《귀가 서럽다》(창작과비평, 2010), 《당신은 북천에 온 사람》(창작과비평, 2018) 등이 있다.

1997년 현대시 동인상, 1999년 작가세계 소설부문 신인상, 2003년 제1회 애지문학상 시부문, 2010년 제7회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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