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181120 시숲/시집 "슬라브식 연애" 발췌 시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8. 11. 22. 00:49

*시집 '슬라브식 연애' 특징-강원도 정선 출신 세친구-박정대 최준, 전윤호-의 시 모음집

 

박정대 시인
출생
1965년강원 정선군
데뷔
1990년 문학사상 시 '촛불의 미학'
수상
2014 제22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외 2건
<최준 시인 >
출생
1963년강원 정선
학력
경희대학교 국문학 학사
<전윤호 시인 >
출생
1964년강원 정선군
데뷔
1991년 월간지 '현대문학' 등단

-박정대-이미지화, 기듬, 상상력 특출

 

**슬라브식 연애/박정대**

 

흑맥주를 마시는 캄캄한 밤,

강원도 내룍 산간지방에 내려진 폭설주의보

 

바람이 컴컴한 하늘을 끌고 내려와 민박집 처마 끝에 당도했을때

나는 나타샤의 살결처럼 하얗게 피어날 폭설의 밤을 생각한다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슬라브족과 노예의 중의적

 

나는 연애지상주의자.지상에서 밤새도록 펼쳐질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폭설은 사흘 밤낮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묵고 있는 민박짐의 아리따운 그녀는 세상이 더러워 세상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온 고독한 여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흑흑, 흑맥주를 마시는 밥은 아주 캄캄하고 추워 지금 내 마음의 내룍에 내려진 폭설주의보

 

그러니까 그녀와 나는 폭설에 의해 고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추워 서로의 체온이 간절해져야 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체온만으로도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그 끝에서 우리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꿈이라 했으니, 그녀와 나는 끝끝내 꿈속에서 깨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함께 흑맥주를 마시며 캄캄하게 계속 따스해져야 하는 것이다. 천일 밤낮은 폭설이 내리든 말든 그녀와 나는 계속 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와 내가 스스로 태양을 피워 올릴 때까지

그녀와 내가 스스로 진정한 사랑의 방식을 터득할 때까지, 그녀와 내가 스스로 슬라브식 연애를 완성시킬 때까지

 

태양의 반대펀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백석 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와 문정희/한계령을 위한 연가 차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뱁새의 방언, 오막살이의 방언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고요히의 방언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니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헐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토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몰운대에 눈 내릴 때/박정대**

 

세상의 끝을 보려고 몰운대에 갔었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사랑보다 더 깊은 눈이 내리고, 눈이 내리고 있었네

강물에 투신하는 건 차마 아득한 눈발뿐

몰운대는 세상의 끝이 아니었네

눈을 들어 바라보면 다시 시작되는 세상

몰운리 마을 지나 광대골로 이어지고

언제나 우리가 말하던 절망은 하나의 허위였음을

눈 내리는 날 몰운대에 와서 알았네

꿩 꿩 꿩 눈이 내리고 있었네

산꿩들 강물 위로 날고 있었네

불현 듯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그리운 이름들

바람이 달려가며 호명하고 있었네

세상의 끝을 보려고 물운대에 갔었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사랑보다 더 깊은

눈이 내리고, 눈이 내리고 있었네

강물은 부드러운 손길로 몰운대를 껴안고

그곳에서 나의 그리움은 새롭게 시작되었네

세상의 끝은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었네

 

-아름아름 아름다운 노래, 리듬이 좋다

 

**세상의 모든 하늘은 정선의 가을로 간다/박정대**

 

문득 하늘을 보면

 

세상의 시월 쪽빛 하늘은 모두 정선의 가을로 간다

 

**가수리는 입을 다무네/박정대**

 

그대 영혼이 지상을 빠져나가던 날

북대 다리 지나 제장 마을로 흐르는 물결을 보네

오늘은 안개의 날, 고송산성 터에서부터 내려온 안개들

운치 백운 지나 가수까지 뒤덮고 있는데

오늘은 어느 곳에 장이 섰을까

무성한 나뭇잎들 외투처럼 걸치고

가랑가랑 가랑비에 젖는 나무의 마음

저 고요하게 외롭고 치명적으로 고독한 자세

오늘은 어느 구름 아래 장이 섰을까

북대 다리 난간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워 물면

사랑은 입술을 빠져나온 담배 연기

정처 없어라, 사랑하는 마음은

가수리 뼝대보다 가파르니

여전히 정처 없어라

사랑을 하며 사는 생도

가도 가도 오리무중일 뿐이어서

가수리 북대 다리 난간에 앉아

강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한 무리의 물오리 떼롤 보네

오늘은 안개의 말, 그렁그렁 눈물 같은 비가 내려와

가수리 낮은 지붕들만 무겁게 젖어 가는데

지금은 슬프게 지상을 떠난 한 영혼을 위해

고요히 침묵의 노래를 불러야 할 시간

멀리 곰배령 아침가리 지나 불어오는 바람에

가수리 강 물결만 가끔 몸을 뒤척이는데

오늘은 뽀얗게 피어오르는 물안개의 날

북대 다리 난간에 앉아

가수는 입을 다무네

가수리는 입을 다무네

 

**가수는 입을 다무네/기형도**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들,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더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 군데 쓸어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보면 축축한 등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첫사랑/최준**

 

앞집 목련나무가 환하게 꽃필 때

철제 대문을 열고 교복 입은 소녀 하나

그 집 걸어 나올 때

검은 책가방과 파란 보온도시락

백지 목련이 배경이 되어

소녀는 꽃 한 송이로 앞만 보고 걸어갔다

꽃송이의 무게와 그 하얀 설렘

나는 이모가 셋

엄마의 다른 이름들

그런데

다들 만년 소녀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아이들 다 가르쳐 떠나보낸 세월 너머

아직도 배운다

이렇게 지니왔는데도

길을 몰라

안경을 쓴다

 

**안개 손님/최준**

 

폭풍의 언덕 없는 그곳에도

풍우의 날들이 있었다 가을은 오고

늦은 아침밥을 먹던 시월 일요일

골목 가득 들어찬 안개

때문에 관절염을 앓았다

연탄불에 구운 조기를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시며

혹여 누가 올까 낡은 찰대문을 닫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여섯 자식들을 어떻게 키웠을까

느닷없지만 안개는 아주 난해한 문장

태어남과 죽음이 도무지 해독되지 않는 이 도시의 질서

모두가 손님이었다

눈을 뜨면 눈이 어두어지던 골목

아침마다 바깥이 지워졌다

 

**외할머니 전상서/최준**

 

어제를 잠 깨면

오늘을 아침 차려 주셨지요

때도 시절도 없이

여섯 자식 낳아 기르신 당신의 마당

수돗가 시멘트 바닥에 핀

비누거픔 꽃술에 손가락 베이며

그랬던, 그 많은 날들은

생이 참 환하게도 잘 보이는

있음에서

다시, 없음으로 내일이

오늘을 데려갔었지요 어제를 완성하려고

당신 닮아 부리만 뾰족한

탈춤을 꿈꾸는 극락조가 날았었지요

날개 깃든 추녀 끝에

수돗물방울 소리가 하루를 마침표 찍었었지요

그리고

다시, 마침내

나날인 허공의 날들이 시작되었죠

아, 그런데

저를 낳은 어머니의 엄마이신 당신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네요

당신 안 계신 당신의 뜨락에서

당신이 낳은 아들딸들의 아들딸들만 어제를 건너와

오늘을 환하게 꽃 피고 있네요

 

**종점풍경/전윤호**

 

오늘 아침은 안개와 먹었다

커튼 내린 당신 집이 보였다

노루처럼 깡충 강아지가 튀어나오고

한 오십 먹은 새들이 울었다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지나가고

이른 아침이면 무조건 학교로 가던 소년은

세상이 안개라는 걸 몰랐다

지친 사람들은 춘천에서 사라지낟

눈 속까지 안개가 들어차고

밤에는 지우개처럼 비가 내리낟

이 뒤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 떠날 때/전윤호**

 

단풍나무 앞세워 가더라

개도 안 짖는 아침

주섬주섬 가방 싸고

들썩이는 어깨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더라

이별하는 순간을 딱 들킨 가을이

마뭇잎 몇 장 황망하게 뿌리고

아무도 울지 않더라

사랑은 아니더라 사는 일이란 게

악착같이 밥을 씹고

적당히 진상도 부리면서

때 되면 알아서 일어나는 눈치가 전부더라

대문도 창도 다 닫힌 동네

식솔들은 모두 잠들었는데

대충대충 눈도장만 남기고

떠나더라 다시 오지 않을 기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