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지/나의 이야기
펌 ) 성경섭 칼럼 <7> 도토리거위벌레의 모성 / 최태지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6. 9. 12. 13:05
성경섭 칼럼 <7> 도토리거위벌레의 모성 / 최태지 |
작성자: 사색의향기 / 작성일 : 2016-07-25 15:31 |
도토리거위벌레의 모성 /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라"
최태지 / 대중화로 한국발레의 르네상스를 이끌다 - 성경섭 방송인 도토리거위벌레의 모성 /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라"
![]() 초여름에 참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도토리가 달린 작은 나뭇가지들이 길섶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톱으로 자른 듯 매끈하게 잘린 면이 누군가가 참나무 가지치기를 했나 싶지만 가지치기라고 보기엔 그리 많은 양도 아니니 더욱 의아한 생각이 든다. 가지에 달린 덜 자란 도토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토리마다 작은 구멍이 나있는 걸 알 수 있다.
잘린 가지들은 도토리거위벌레라는 작은 딱정벌레가 생존을 위해 벌인 작업의 결과물이다. 도토리나무에 서식하는 도토리거위벌레는 거위 목처럼 긴 주둥이가 특징이다. 암컷은 도토리에 구멍을 뚫고 알을 낳은 다음 긴 주둥이로 가지째 잘라 땅에 떨어뜨린다. 도토리 속에 들어있던 알은 애벌레로 부화해 도토리의 과육을 먹고 자란다. 애벌레는 성충이 되기 위해 낙엽이 쌓인 땅 속을 파고 들어가 흙집을 짓고 겨울을 난다.
곤충생물학자들은 도토리거위벌레의 ‘가지자르기’를 종족 보존을 위한 진화적 적응으로 본다. 익지 않은 도토리의 성분이 애벌레 먹이로 적당하기 때문에 도토리를 일찌감치 나무에서 분리한다는 가설과, 설익은 도토리에 알을 까면 다람쥐나 멧돼지 같은 동물에게 먹힐 확률이 낮아진다는 가설을 세우고 연구하고 있다. 도토리를 먹고 큰 유충이 땅 속으로 쉽게 파고 들 수 있도록 알이 든 도토리를 땅에 떨어뜨리는 방법을 선택한 것도 절묘하다.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잎이 달린 가지째 떨어뜨리는 것도 계산된 행동일 수 있다니 그야말로 절단 행동은 도토리거위벌레의 미래를 대비한 신통방통한 생존전략인 셈이다.
인간도 미물인 도토리거위벌레에게서 생존전략을 배운다.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불확실성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있기 마련이다. 그 중의 하나가 ‘시나리오 플래닝’이다.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도 없고, 피해 갈 수도 없다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도토리거위벌레처럼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를 시나리오로 만들어 놓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응전략을 짜는 것이다.
“퇴근 후 여자 친구와 저녁약속이 있다. 오래 사귄 사이로 오늘 드디어 프러포즈를 할 생각이다. 약속시간은 퇴근 한 시간 뒤인 7시.. ‘여친’은 기다리는 걸 몹시 싫어해서 약속시간에 늦으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부장님이 불러 거래처에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퇴근시간이 늦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약속장소까지는 지하철을 타면 30분이지만 차를 가지고 가면 교통체증이 심해 1시간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 저녁을 먹고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차를 놔두고 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프러포즈를 완수하고 결혼에 골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나리오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상적인 결과나 그 구체적인 과정’이다. ‘시나리오 플래닝’에서의 시나리오는 미래를 예측해서 그려보는 각본이란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단순히 현재의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될 거란 가정에서 나온 ‘단순한 예측’이나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을 그린 ‘비전’과는 다른 의미다. 예상할 수 있는 수많은 가상 스토리 중에서도 개연성과 논리적인 적합성을 갖추고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 라야 한다.
이런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해
①문제를 파악하고 변화를 추적 분석하고,
②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각각의 시나리오에서 구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을 짜고,
③행동에 임하는 과정이 통틀어서 ‘시나리오 플래닝’인 것이다.
다시 도토리거위벌레로 돌아 가보자. 작은 딱정벌레의 ‘절단행동’에는 애벌레를 성충으로 키우기 위한 치밀한 ‘시나리오 플래닝’이 함축돼 있다.
① 도토리 거위벌레는 먼저 애벌레가 당면할 수 있는 문제들을 파악했다.
애벌레를 양육하기에 좋은 도토리의 상태는 어떤 것인지, 애벌레가 든 도토리가 다람쥐나 멧돼지 같은 짐승들에게 먹힐 확률은 없는지, 애벌레가 성충이 되기 위해서는 땅속에 흙집을 지어야 하는데 보다 쉽게 땅에 접근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고려한다. ② 다음으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세웠다.
덜 익은 도토리에 알을 낳는다면 애벌레에게 좋은 먹이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 덜 자란 열매이니 산짐승들에게 먹힐 확률도 적을 것이다. 덜 익은 도토리를 땅 위로 떨어뜨려 놓으면 다자란 애벌레가 쉽게 땅속으로 파고들게 성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③ 마지막으로 ‘절단 행동’에 들어갔다.
덜 익은 도토리를 골라 구멍을 파고 알을 낳은 뒤 도토리가 달린 가지를 잘라 땅에 떨어뜨린다. 도토리 속의 알이 충격으로 상하지 않도록 충격완화를 위해 이파리가 달린 가지째 잘라 땅위로 떨어뜨린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좌우한다. 한 마리 작은 딱정벌레에 불과한 ‘도토리벌레의 모성’ 속에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전략이 숨겨져 있는 자연의 섭리가 놀랍다. 도토리거위벌레의 절단행동에서 보듯이 숱한 갈림길에서 ‘좋은 선택’이란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내리는 결정이다.
“인생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선택의 연속이다(Life is C(Choice) between B(Birth) and D(Death)”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최태지/ 대중화로 한국발레의 르네상스를 이끌다
![]() “바닥이 미끄럽지만 않다면 어디든 가서 공연을 했습니다. 발레를 즐기는 관객층을 늘리려는 뜻도 있었지만, 무용수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많이 주겠다는 의도가 컸습니다. 무용수는 자주 무대에 서야 관객의 박수를 받으면서 기량을 발전시키고 항상 긴장하게 됩니다.” 지난 1996년 37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립발레단 단장에 취임해 대중화로 한국 발레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 예술 감독은 재일교포 2세다. 1983년 국립발레단원으로 와 한국생활 30년을 넘겼지만 아직도 서툰 우리말 억양에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 발레를 향한 열정만큼은 모두가 알아준다. 최태지에게 발레란 ‘자신이 살아내야 할 세상’이었다.
9살부터 발레를 시작한 최태지는 ‘네 인생에서 발레를 떼어낼 수 없다. 발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신 고등학교 은사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최태지에게 발레는 하루하루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었다. 발레를 사랑하지만 결혼하면 절대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결심을 수십 번씩 되뇌었다. 실제로 결혼해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는 발레화를 벗어 던진 적도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마친 그녀가 한국에 오게 된 건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권유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던 때다. 장학생 선발에 지원했지만 한국 국적이 문제가 돼 떨어졌다. 발레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부모님은 “돈은 벌 수 있지만 예술은 살 수 없는 거다”라며 한국으로 갈 것을 권했다. 차별을 받으면서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오신 부모님으로선 딸 만큼은 차별 없이 하고 싶은 발레를 맘껏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바란 것이다. 국립발레단을 택한 것은 조국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높이 산 것이다. 최태지가 선택한 발레의 대중화는 어찌 보면 그녀를 모국 대한민국의 국립발레단으로 보내는 ‘메신저’였던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었다.
서른일곱이라는 나이, 서투른 한국말, 재일동포 출신 무용수를 국립발레단장에 앉힌 것은 파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행정능력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문화예술계의 우려를 씻어냈다. 최태지는 12년간 국립발레단장 겸 예술 감독으로 있으면서 발레 대중화를 위해 현장을 발로 뛰었다. 연간 100회 정도 지방소도시, 마을까지 찾아가는 공연을 했다. 공연제목도 ‘찾아가는 발레 이야기’였다.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아침 일찍부터 관객들이 극장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의 수준도 놀라웠다. “이런 세계가 있는 줄 몰랐다. 공연 내내 너무 행복한 시간 이었다”는 감사의 편지가 쏟아졌다. 복지시설이나 장애아를 찾아가는 공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공연에 집중하는 장애아들을 보며 부모들은 ‘아이들이 이렇게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 예술에는 빈부나 지역격차 신체건강유무에 따른 장벽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제가 재일동포 출신이라 당시 한국어가 지금보다 더 서툴렀어요. 말도 잘 안 되는데 공무원들 만나서 예산 달라고 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거저 얻는 것은 없잖아요. 절박하게 일했어요. 동포로서 한국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도 컸고요. 부모님도 항상 이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어요.”
최단장은 발레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발 벗고 나섰다. ‘해설이 있는 발레’, ‘찾아가는 발레’, ‘1만 원짜리 발레’ 등 대중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해 각광을 받았다. 김주원·김지영·이원국·김용걸 등의 스타 무용수가 등장했고, 프로그램을 통해 발레가 대중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대중화의 결과는 관객층의 변화로 뚜렷하게 나타났다. 관객의 90%가 무용계 사람이던 것이 대중화가 성공을 거둔 이후에는 일반관객 90%로 역전됐다.
“제가 국립발레단 프리마돈나로 활약하던 1983년엔 1층 객석만 그것도 3분의 1정도 채울까 말까 했는데, 대중화 이후엔 초대권 없이 100% 일반 관객으로 채웠습니다.”
2013년 지휘자 정명훈과 협연한 국립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은 최단장이 발로 뛸 발레 대중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최단장은 단원들의 발레수준은 높지만 음악이 따라주지 못하는 게 항상 고민이었다. 정명훈과의 인연은 그보다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명훈씨가 지휘하는 공연의 콘서트홀 분장실에서 무작정 기다리던 최단장은 정씨를 보자마자 대뜸 ‘국립발레단입니다’라고 운을 뗀 뒤 협연을 요청한다. ‘한 번만 국립발레단 공연을 보면 꼭 같이 할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내키지 않아하던 정씨는 마침 서울시향의 ‘로미오와 줄리엣’ 연주가 있는데 중간 중간에 발레 연기를 할 수 있는지 물어본다. 공연을 마친 정씨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한국 발레가 이렇게 발전 했냐’며, ‘협연 프로젝트를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최단장은 단원들에겐 호랑이 선생님이다. 연습 중 단 한 명이라도 기가 빠진 모습을 보였다간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진다. 반주 음악소리보다 큰 소리로 야단을 치기 때문에 현역시절엔 항상 쉰 목소리를 달고 다녔다. 비록 발레화는 신지 않았지만 단원들과 머릿속 마음속으로 같이 춤을 추고, 체중조절을 위해 끼니를 거르는 단원들과 행동을 같이 하다 보니 살이 찔 겨를도 없었다. 발레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붇고 돌아와 집에서는 ‘시체’가 되는 엄마 때문에 두 딸은 발레가 밉다며 애정을 갈구했다. 그런 두 딸도 결국은 발레에 입문했다. ‘모전여전’이 된 격이다.
현역에서 은퇴한 최단장의 꿈은 발레학교를 세우는 일이다. 발레는 사실 4-50대 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활동기간이 짧으니 빨리 시작해 활동기회를 늘리는 게 목표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전문가가 발굴해 키우는 정규학습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18살 정도에 입단해 20년 정도 무대에 서는 시스템을 생각하고 있다. 교육비 부담 때문에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인재들을 발굴해 낼 계획이다.
“한국 사람들은 재능 있고, 머리도 좋고, 음악성에다 집중력 있지요 춤 좋아하고 열정도 있습니다. 아이 때부터 잘 키우면 아마도 발레 세계 톱5에 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14년 말 최태지 댄스컴퍼니를 만들고 문화대중화를 화두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발레리나도 발레단장도 아닌 대중에게 발레를 알려주는 ‘멘토’의 역할이다. 후배들과 함께 발레와 무용수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주는 이색적인 발레 토크쇼를 무대를 펼치고 있다. 후배들에게 자신이 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게 그의 꿈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하며 달리면 제풀에 꺾여 쓰러져요. 그냥 지금, 오늘 웃고,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부대끼면서 사세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요. 그런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보일 거예요.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죠. 자기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알았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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