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방/시모음

문정희 시모음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6. 4. 22. 23:24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가도 이것만은 안되자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아들에게/ 문정희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때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시집 『어린 사랑에게』(미래사, 1991)

 

당신의 냄새 / 문정희

 

말갈기 날리며 천 리를 달려온 말이

별빛 땀을 뿌리며

멈춰 설 때

풀밭에서 쏴아 하니 풍기는 냄새

 

숲 속에 살고 있는 안개가

나무들의 겨드랑이를 간지를 때

푸른 목신들이 간지럼을 타며

소소리바람을 일으키는 냄새

 

물속에서 물고기들의 비늘이

하늘을 나는 새들의 깃털과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출 때

땅 속의 뿌리들도 그걸 알고

저절로 어깨를 들썩이는 냄새

꽃이 필 때

발그레 탄성을 지르며

진흙들이 내뿜는 냄새

 

당신의 냄새는

내가 최초로 입술을 가진 신이 되어

당신의 입술과 만날 때

하늘과 땅 사이로 쏟아지는

여름 소나기 냄새

 

사랑해야 하는 이유 - 문정희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강물을 나눠 마시고

세상의 채소를 나누어 먹고

똑같은 해와 달 아래

똑같은 주름을 만들고 산다는 것이라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세상의 강가에서 똑같이

시간의 돌멩이를 던지며 운다는 것이라네

 

바람에 나뒹굴다가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

나뭇잎이나 쇠똥구리 같은 것으로

똑같이 흩어지는 것이라네

 

공항에서 쓸 편지

여보,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나 지금 결혼 안식년을 떠나요.

그날 우리 둘이 나란히 서서

기쁠때나 슬프때나 함께하겠다고

혼인서약을 한 후

여기까지 용케 잘 왔어요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고

아니 오아시스가 사막을 가졌던가요

아무튼 우리는 그 안에다 잔 뿌리를 내리고

가지들도 제법 무성히 키웠어요.

하지만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병사에게도 휴가가 있고

노동자에게도 휴식이 있잖아요

조용한 학자들조차도

재충전을 위해 안식년을 떠나듯이

이제 내가 나에게 안식년을 줍니다.

여보,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내가 나를 찾아가지고 올 테니까요.

 

                                           유리창을 닦으며

 

누군가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정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설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말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