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지/나의 이야기

25년 동안 서울 광화문 4거리 교보문고 '인기 광화문 글판'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5. 10. 21. 13:42

1. 풀꽃/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2. 방문객/정현종

 

사람이 온다는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3. 대추 한 알/장석주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 둥 몇 개, 벼락 몇 개

 

저게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안에 태풍 몇개
저안에 천둥 몇개
저안에 번개 몇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리는 없다
저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밤
저안에 땡볕 한 달
저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것 일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4. 풍경달다/정호승

 

먼 데서 바람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5, 흔들리며 피는 꽃/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곧게 세웠나니

흔들리면서 꽃망울 고이고이 맺었나니

흔들리지 않고 피는 사랑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비바람 속에 피었나니

비바람 속에 줄기를 곧게곧게 세웠나니

빗물 속에서 꽃망울 고이고이 맺었나니

젖지 않고 피는 사랑 어디 있으랴

 

아프지 않고 가는 삶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반짝이는 삶들도

다 아픔 속에서 살았나니

아픔 속에서 삶의 꽃 따뜻하게 살렸나니

아픔 속에서 삶망울 착히착히 키웠나니

아프지 않고 가는 삶 어디 있으랴


6, 약해지지 마/시바타 도요

 

있잖아, 힘들다고 한숨 짓지마

햇살과 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7, 해는 기울고/김규동

 

가는 데 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

 

운명

 

기쁨도

슬픔도

가거라

 

폭풍이 몰아친다

오, 폭풍이 몰아친다

이 넋의 고요

 

 

인연

 

사랑이 식기전에

가야 하는 것을

 

낙엽 지면

찬 서리 내리는 것을

 

 

 

당부

 

가는 데 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보면

보이리

길이

 

8, 마흔 번째 봄/함민복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9, 길/고은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10, 휘파람 부는 사람/메리 올리버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은 아니지만 곧 우리는

새끼 양이고 나뭇잎이고 별이고

신비하게 반짝이는 연못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