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동안 서울 광화문 4거리 교보문고 '인기 광화문 글판'
1. 풀꽃/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2. 방문객/정현종
사람이 온다는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3. 대추 한 알/장석주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 둥 몇 개, 벼락 몇 개
저게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안에 태풍 몇개
저안에 천둥 몇개
저안에 번개 몇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리는 없다
저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밤
저안에 땡볕 한 달
저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것 일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4. 풍경달다/정호승
먼 데서 바람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5, 흔들리며 피는 꽃/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곧게 세웠나니
흔들리면서 꽃망울 고이고이 맺었나니
흔들리지 않고 피는 사랑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비바람 속에 피었나니
비바람 속에 줄기를 곧게곧게 세웠나니
빗물 속에서 꽃망울 고이고이 맺었나니
젖지 않고 피는 사랑 어디 있으랴
아프지 않고 가는 삶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반짝이는 삶들도
다 아픔 속에서 살았나니
아픔 속에서 삶의 꽃 따뜻하게 살렸나니
아픔 속에서 삶망울 착히착히 키웠나니
아프지 않고 가는 삶 어디 있으랴
6, 약해지지 마/시바타 도요
있잖아, 힘들다고 한숨 짓지마
햇살과 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7, 해는 기울고/김규동
가는 데 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
운명
기쁨도
슬픔도
가거라
폭풍이 몰아친다
오, 폭풍이 몰아친다
이 넋의 고요
인연
사랑이 식기전에
가야 하는 것을
낙엽 지면
찬 서리 내리는 것을
당부
가는 데 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보면
보이리
길이
8, 마흔 번째 봄/함민복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9, 길/고은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10, 휘파람 부는 사람/메리 올리버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은 아니지만 곧 우리는
새끼 양이고 나뭇잎이고 별이고
신비하게 반짝이는 연못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