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지/나의 이야기

[Why] [그 작품 그 도시] 익숙함과 설렘 사이, 당신 사랑은 어디쯤에 있나요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5. 3. 28. 14:46

[Why] [그 작품 그 도시] 익숙함과 설렘 사이, 당신 사랑은 어디쯤에 있나요

  • 백영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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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5.03.28 03:00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토론토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 호숫가에 펼쳐진 마천루 중 가장 높이 솟은 건물은 토론토의 랜드마크인 CN타워다.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 호숫가에 펼쳐진 마천루 중 가장 높이 솟은 건물은 토론토의 랜드마크인 CN타워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를 본 백영옥은 “모든 인간은 결국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다”고 말했다. /pixabay 제공

    반복해서 자주 꾸는 꿈이 있다. 장소는 대개 '기차역'이나 '공항',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을 잃은 상태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걷고 있지만 미로처럼 도대체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또 다른 꿈이 하나 더 있다. 급하게 집을 나서야 하는데 열쇠나 지갑을 찾지 못하는 꿈이다. 집 안의 모든 서랍을 다 열어보아도 열쇠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나는 결국 차를 놓치거나 약속 시간에 늦는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의 주인공 '마고'가 토론토로 돌아가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대니얼에게 환승역에서 길을 잃을까 봐 무섭다고 말할 때, 나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공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고는 결국 노약자나 장애인들을 위한 휠체어를 선택한다. 튼튼한 다리를 가진 그녀는 스튜어디스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비행기를 갈아탄다.

    "경험 때문에 생긴 두려움이 아니에요. 길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길을 잃어버릴까 봐 걱정하는 게 더 무서워요."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옆 좌석에 앉게 된 남자와 여자. 이 둘은 그전에, 이미 몬트리올의 한 유적지에서 간통죄를 주제로 한 연극을 보다가 부딪쳤다. 그런데 우연히 비행기를 함께 탄 것도 모자라 둘은 이웃사촌이었다. 사랑의 예감이 피어오르는 택시 안, 토론토의 작고 아름다운 마을에 택시가 도착하자마자 위기감을 느낀 마고가 선언하듯 말한다.

    "저 유부녀예요!"

    결혼 5년 차인 작가 지망생 마고와 닭고기 전문 요리책을 쓰는 그녀의 남편 '루'는 단란한 커플이다.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마고와 루의 집에는 언제나 닭고기 냄새가 가득한데, 부글부글, 지글지글 음식 만드는 소리와 토론토의 더위가 합쳐지면 뭔가 몽환적인 느낌이 날 정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둘만 아는 신호인 괴상한 게임을 하는 이 부부에게 특별한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균열은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 마고의 마음이 창 밖 '대니얼'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인력거'를 끄는 대니얼은 마고 주위를 서성댄다. 그녀가 강습을 받는 수영장에도 나타났다가 함께 바에 가서 마티니를 마시기도 한다. 마고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30년 후면 내 나이는 58세예요. 그러니까 30년 후에, 등대에서 만나 당신이랑 키스할래요. 2040년 8월 5일, 동부 시간으로 오후 2시. 그때까지는 나는 유부녀예요. 하지만 결혼 생활 35년이면 남편이 나를 많이 믿을 거예요. 그때는 키스해도 마음에 안 걸릴 것 같아요."

    이 영화는 대니얼이 아닌 마고의 영화다. 그녀가 처음에 말했던 길을 잃는 공포는 사실 그녀의 내면 풍경이기도 하다. 출입구에 분명한 표지판이 붙어 있는 공항의 환승역조차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남자를 '갈아타는 일'은 고통 그 자체다. 더구나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새 남자를 더 사랑해서 생긴 일이니 스스로를 자책하는 건 당연지사. 이때, 비로소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을 감당하는 일'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녀는 대니얼이 떠나가고 나서야 그에 대한 사랑을 명확히 깨닫고 남편에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던 아내를 떠나보내야 하는 남편의 마음은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져서 화면 밖에서 루의 얼굴을 보는 사람까지 내내 괴롭힌다. 하지만 루는 결국 여자의 마음을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떠나겠다고 말한 건 마고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그녀에게 "가라!"고 선언한 건 루였다.

    오래된 사랑과 설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옛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개의 사랑이 그렇지만 우리는 그(그녀)에게 없지만, 있다고 믿었던 그 무엇을 사랑한 탓에 실패한다.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결국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갈 때 가슴이 아픈 건, 그 사람이 떠나서가 아니라, 결국 내가 그 사람에게 준 그 많은 시간과 마음 모두를 잃게 되었다는 상실감 때문이다.

    
	우리도 사랑일까―사라 폴리 감독 영화

    마고가 혼자 놀이기구를 타는 마지막 장면. 나는 눈을 감고 마고는 과연 자신이 선택한 사랑과 포기한 사랑 사이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결국 사랑 때문에 또다시 외롭고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사랑이 끝나야 그것의 시작을 가늠해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랑은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실체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사랑이라 생각했던 감정이 실은 집착이나 욕망, 연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내가 사랑을 느꼈던 대부분의 남자는 실패한 첫사랑의 변주이거나 그림자였다.

    사족 같지만 만약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마고 역을 맡은 배우 미셸 윌리엄스와 꼭 일해보고 싶을 것 같다. 캐나다 여자 축구팀의 주장처럼 보이는 건강한 명랑함이 섬세함을 만나면 이런 놀라운 연기가 만들어진다는 걸 알고 새삼 놀랐다. 영화의 첫 장면. 마고가 음식이 익고 있는 오븐 속을 멍하게 바라보던 얼굴이 내내 잊히지 않는다. 온몸이 끈적끈적해지는 것 같은 토론토의 더위도.

    ●우리도 사랑일까―사라 폴리 감독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