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시/ 남편, 부부, 오빠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부부 / 문정희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꽃 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다
*오빠/문정희*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려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캐듯 캐내어주지 않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감자/문정희*
허허벌판 감자밭에
항아리만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감자를 캐다가 배가 고파서
감자더미에 올라앉아
감자를 혼자 구워먹고 있었다
멀리서 한 사내가 고란이 같이 *고라니
뛰어왔다
쫒기며 쫒기며 숨겨달라고 했다
여자는 감자 먹던 손으로 급한 김에 아래를 가리켰다
고란이는 치마 속으로 들어갔다. *사내
둘은 큰 항아리가 되었다.
총든 병사가 달려왔다
여자는 감자 먹던 손으로 급한 김에
먼 데를 가리켰다
병사는 먼 데로 사라지고
여자는 앉은 채로 흔들렸다
산이 뒤뚱거렸다
감자가 입으로 마구 들어갔다
감자밭에 불길 치솟았다
여자는 날마다 뚱뚱해졌다.
두엄만큼 되었다.
집더미만큼 되었다.
드디어 여자는 감자를 낳았다.
천년동안 줄줄이 낳았다.
우리 지구에는 감자들로 가득해셔ㄸ다.
닮은 감자들은 서로가 우스워서
맨날 웃었다.
총 든 병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갔는가?
감자들은 가끔 생각했다.
-‘선녀와 나뭇꾼’ 스토리의 변용
-‘총든 병사’에 의해 쫒기는 사내를 치마 속에 숨겨주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남성을 포용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줌. 이런 포용력은 세상의 모든 푸른 생명들을 길러내는 대지의 풍요로움임, 위기에 처한 사내를 품어주는 여자의 행위는 자식을 길러내는 어머니의 모습.
-소재인 ‘감자’와 ‘항아리’는 둥근 공통점, ‘두엄’은 감자 생산의 기제로 사용
*머리 감는 여자/문정희* *이야기 주변을 제목화 굿
가을이 오기 전
*1)뽀뽈라로 갈까
들마다 태양의 얼굴을 새겨놓고
햇살에도 피가 도는 마야의 여자가 되어
검은 머리 길게 땋아 내리고
생긴 대로 끝없이 아이를 낳아볼까
풍성한 다산의 여자들이
초록의 밀림 속에서 죄 없이 천년의 대지가 되는
뽀뿔라로 가서
야자잎에 돌을 얹어 둥지를 하나 틀고
나도 밤마다 쑥쑥 아이를 배고 *리듬
해마다 쑥쑥 아이를 낳아야지 *리듬
검은 하수구를 타고
콘돔과 감별당한 태아들과 *장황한 부연설명 불필요
들어내버린 자궁들이 떼지어 떠내려가는
뒤숭숭한 도시
저마다 불길한 무기를 숨기고 흔들리는
이 거대한 노예선을 떠나
가을이 오기 전
뽀뿔라로 갈까
맨 먼저 말구유에 빗물을 받아
오래오래 머리를 감고
젖은 머리 그대로
천년 푸르른 자연이 될까
*1) 뽀뿔라 ; 멕시코 메리다 밀림 속의 작은 마을 이름
-2연으로 짧게 구성되었음에도 압축미와 리듬감이 우수
-문명 혹은 근대성과는 동떨어진 무성한 초록의 원시림 뽀뿔라에서 왕성한 산욕産慾을 노래, 그것은 ‘검은 하수구를 타고 버려진 콘돔과 감별당한 태아들’에 대한 반감이며 문명세계의 폭력성을 의미화한 것,
문정희 시인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졸업 진명여고 재학시 시집 <꽃숨> 발간.
1969년 <월간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나옴.
1976년 제 21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시극 <납의 탄생>, <날개를 가진 아내>,
산문집 <젊은 고뇌와 사랑> <청춘의 미학> <사랑의 그물을 던지리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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