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지/나의 이야기

펌)'오라이'-탕탕- 누님들 안녕하시죠

그대 그리고 나/포항 2014. 8. 17. 20:19

 

입력 : 2014.08.16 07:28

  

 

"오라이~"-탕탕-.

'오라이'는 'all right'을 우리 입에 잘 붙게 만든 말이고 '탕탕'은 차장 누나가 손바닥으로 버스 옆면을 두드리는 소리다. 그렇게 차장이 운전기사에게 출발 신호를 보내면 버스는 물고기처럼 S자를 그리며 진행을 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뒤집어진 S자 형태를 그렸다. 그렇게 진행을 하는 이유는 아직 버스 문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승객과 버스 차장을 쓸어담기 위해서였다.

버스 이미지
버스가 출발하면서 시계 방향으로 커브를 돌면 원심력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왼쪽으로 쏠렸다. 그렇게 짐짝이 된 사람들이 버스 왼쪽으로 몰려서 버스 오른쪽에 여유 공간이 생기면 그제야 차장도 버스 안으로 들어오고 문짝을 닫을 수가 있었다. 개문 발차가 금지되기 전에는 문을 닫고 출발하는 버스는 거의 없었다. 운전기사가 달리는 관성으로 문을 닫고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골에서 상경한 순진한 처녀가 감당하기에 버스 차장은 녹록한 직업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편리한 교통카드 대신에 승차할 때마다 한 장씩 끊어서 내던 회수권을 사용하거나 현금을 냈다. 일일이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고 하려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허리춤에 꼭 전대를 차고 있었다. 회수권은 일반용과 학생용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열 장 단위로 인쇄가 돼 있었다. 생전 용돈이라곤 구경도 못 하던 때라 학생들은 열 장짜리 회수권을 조금씩 작게 잘라 열한 장으로 만들어 쓰기도 했다. 버스에 올라탈 때는 타느라 바빠서 회수권을 채 낼 사이도 받을 사이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에는 내릴 때 받았는데 "뒤요" 하면서 뒤에 내리는 학생이 낼 거라고 하며 앞의 학생이 내리고 그다음 학생도 "뒤요" 하며 내리고 하다가 마지막 학생도 "뒤요" 하고 그냥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버스 차장들의 애환 중에 이런 일은 애교에 지나지 않았다. 업주나 관리자들은 차장들이 소위 '삥땅'이라고 하는 돈 떼먹기를 한다고 의심을 해서 정기적으로 '센타'라고 하는 주머니 검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추행이 일어나기 일보 전이 아닐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그런 반면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장도 있었다. 바로 고속버스 안내양. 하는 일은 버스 차장이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제복의 우아함이나 멋을 낸 모자, 무엇보다 문에 매달려서 손바닥으로 쇠판을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치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상당히 여성스러워 보였다. 마치 비행기 승무원처럼 손님에게 물을 떠다 준다거나 간간이 안내 방송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일반 버스 차장도 제복은 갖추고 있었지만 일이 워낙 험하다 보니 옷의 본새가 남아날 수가 없었다. 옷소매는 닳아서 나달나달하고 터진 바지 옆구리는 대충 옷핀을 꽂아 임시로 꿰매기 일쑤였다.

버스 정류장 한 구간 사이에 차 문고리를 붙들고 졸고 있는 차장을 보고 애처로운 심정이 돼보지 않은 사람은 시대극을 볼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버스 차장을 하며 그렇게 억척스럽게 벌어 동생 뒷바라지도 하고, 술로 탕진해 노년이 막막한 부모 봉양을 하기도 했다. '오라이', 국적 없는 말을 외치며 모진 세월을 건너온 그분들은 다들 안녕하실까? 왜 추억은 고통에도 반창고를 붙여주는지…. 버스 차장~, 돌이켜 보니 아스라이 그립기까지 하다.

김창완 | 가수